#와인의 침전물 #남겨둔 이유
오래전, 저녁 모임에서 막걸리를 흔들지 않고 최대한 가라앉혀서 조심스럽게 맑은 부분만 따라서 주더군요. 첫 잔은 모두가 그렇게 잔을 받았고, 이후에는 각자 취향껏 마시는 분위기였어요. '굳이' 이렇게 마시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어요. 집에 와서도 몇 번 해봤는데 맑은 술은 청주나 소주로 확실하게 즐기고, 막걸리는 골고루 잘 섞어서 마시는 것으로 돌아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묵직하고 든든한 질감은 막걸리의 존재 이유니까요.
와인에 가라앉은 침전물, 괜찮을까
레드와인을 잔에 담았을 때 작은 입자들이 바닥에 부드럽게 가라앉는 모습을 본 적 있으신가요. 음료에서 침전물을 발견하는 건 생소한 일은 아닙니다. 반드시 잘 흔들어서 마시라는 안내 문구가 라벨에 있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와인도 여기에 해당하는지 궁금합니다. 흔들어서 잘 섞어야 하는지, 가라앉힌 대로 조심해서 마셔야 하는지, 아무리 와인이 저렴한들 막걸리의 몇 배가 넘는 가격인데 잘못 마시면 아까우니 어떻게 해야 맛에 지장이 없는지, 혹시 잘못 보관한 건 아닌지, 마셔도 탈은 없는지 이번 기회에 알아봅니다.
와인의 침전물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침전물의 성분은 탄닌, 색소, 타르타르산염으로 모두 와인이 맛있어지는 데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에요. 잘 숙성된 와인에서만 나타나니 좋은 현상입니다. 출시 전에 말끔하게 여과하지 않는 건 와인의 특성과 복합적인 풍미를 유지하기 위함이기도 해요. 와인을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와인이 지닌 고유함과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것을 철학으로 지닌 와인 메이커들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덩어리로 뭉쳐졌어도 그러는 동안 맛은 훨씬 더 좋아졌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침전물 덕분에 풍부해진 맛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만한 일입니다. 그대로 마시면 매끈한 텍스처를 기대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테니 디캔팅 하는 방법이 있어요. 침전물의 의미도 알았고 입자도 걸러낼 수 있으니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잘 숙성된 와인의 풍부하고 부드러운 매력을 즐길 일만 남았습니다.
처음부터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묵묵하게 말없이 와인을 맛있게 해준 친구들인데 나중에는 모양도 좋지 않고 입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걸러내는 마음이 어딘가 편하지는 않습니다. 행여나 지저분한 찌꺼기로 치부하지 말고 그동안 애써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디캔터로 따른 맑은 첫 잔에 담아봅니다.
무언가, 無言歌, Songs Without Words, Lieder ohne Worte
펠릭스 멘델스존의 '무언가'는 말 그대로 '말이 없는 노래'입니다. 모든 기악곡이 '무언가'이긴 한데 굳이 그런 이름을 갖고 있으니 원래는 '유언가'인데 '무언가'가 된 특별한 사정이 있나 싶어집니다. 요즘으로 치면 6곡씩 8집까지 나온 시리즈 앨범이에요. 복잡하고 어려운 암호로만 되어 있지 않고 제목도 있어요.
Lieder ohne Worte, Op. 19 - 1. Andante con moto "Sweet Remembrance"
1집의 첫 곡인데 <달콤한 추억>으로 알려져 있죠. 49곡 가운데에는 귀에 익숙한 곡들도 있어요. 휴대폰 벨소리로 유명한 <봄의 노래>도 '무언가' 중 하나입니다. 팝이나 가요처럼 한 곡의 개념이 없고 저마다 길이가 다른 여러 악장들로 구성되어 작품 하나가 완성되던 시절인데, 요즘 스타일에 맞는 형식이라니 멘델스존이 앞날을 내다 본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심지어 한 곡당 시간이 3분 내외다 보니 한글 가사를 붙여 볼까 하는 충동이 일기도 했답니다.
깔끔한 피아노 선율에 곡마다 제목을 남긴 멘델스존의 속내가 궁금합니다. 원래 담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맞춰보라는 수수께끼인지, 아니면 후대에서 작품을 완성하도록 예술적 여지와 공간을 열어둔 건지 궁금합니다. 중요한 침전물을 거르고 맑은 것만 따라서 남겨준 것 같아요.
6곡씩 8집이면 48개인데 총 49곡인 이유는 마지막 한 곡이 독립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피아노곡인데 49번째 곡은 첼로도 함께합니다. 요즘 HAUSER의 섹시한 첼로에 빠져서 잠시 잊고 있었던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로 들어봅니다.
처음과 마지막을 들으면 전 곡을 다 감상한 듯한 기분이지 않을까요. 위에 복잡한 제목으로 보여드린 <달콤한 추억>은 김정원씨의 감성을 담은 연주가 좋더군요. 김정원씨가 나이들면서 저에게 맑은 막걸리를 권했던 선생님을 닮아가고 있는데 와인과 음악의 조합을 글로 쓰다가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습니다. 객관적인 감상을 위해 안드라스 쉬프의 피아노도 준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x_bnr5jLKU
https://www.youtube.com/watch?v=4shK5SnU3Hw
https://www.youtube.com/watch?v=vDp20MuO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