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외로운 겨울을 견디고 #강하고 아름답게 #달콤한 축복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는 두루 마음이 풍요롭습니다. 식욕은 덩달아 풍성해집니다. 몸매도 더불어 넉넉해집니다. 겨울에는 다음 해 농사 준비를 하며 봄을 기다리는 게 순리인데 여기, 새해가 밝으면 밭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지는 온통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강추위 속에서 손으로 수확합니다. 영하 10도의 날씨가 4~5일 지속되면 한강물이 얼었다고 뉴스에 나오는데, 이런 맹추위가 열흘 이상 지속되어야 수확이 가능하답니다. 그곳에 살아 숨쉬는 존재가 있을까 싶습니다.
아이스와인, 그 배경은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는 포도를 나무에 방치한 채 겨울 동안 수분이 얼도록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래 건강했던 포도가 얼어붙으면서 건포도 크기로 농축되니 당도는 꿀입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나오는 포도 즙의 양은 톨 사이즈 정도입니다. 지역도 제한적이고 입지에 따라 날씨마저 매년 허락되지 않으니 수확량이 얼마나 적겠어요.
이렇게 귀하게 얻어진 밀도 높은 시럽을 발효해서 만든 게 아이스와인입니다. 독일에서는 아이스바인(Eiswein)이라 부르죠. 아이스와인을 만드는 주요 품종은 리슬링입니다. 미국, 캐나다에서도 좋은 리슬링과 아이스와인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전통적인 종주국은 역시 독일, 오스트리아입니다.
리슬링을 알아야 아이스와인을 알 수 있다
리슬링의 매력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드라이함부터 스위트함까지 다양한 당도의 레벨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허브, 꽃향기, 청사과, 배, 감귤, 복숭아, 파인애플, 망고, 멜론 등 세상의 모든 향기로운 식물과 꽃과 과일을 그 작고 영롱한 한 알에 품고 있습니다.
어린 와인으로 상큼하고 신선하게 즐길 수도 있고, 잘 숙성시키면 부드러운 텍스처에 토스트, 벌꿀 향을 담은 최상급 와인이 됩니다. 페트롤 뉘앙스의 독특함도 빼놓을 수 없죠.
잘 익은 리슬링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오크 숙성을 하지 않아요. 경우에 따라 여러 번 우려내서 특성이 거의 사라진 오래되고 큼직한 오크통을 사용하는 정도입니다.
존재만으로도 훌륭한 와인, 그런데 완벽한 페어링까지
한식부터 서양식까지 국적 불문, 단짠은 물론 아시아의 강한 향신료와도 잘 어울리는 사교성, 인스턴트 배달 음식부터 고급스러운 파인 다이닝 코스까지 모든 품격에 맞추는 월클 수준의 융화력입니다.
사연 없는 인생은 없다. 세상 부러운 와인, 리슬링마저도
이번 시리즈에서 리슬링이 세 번 등장했습니다. 사랑받는 화이트와인의 품종이면서, 우아한 황금빛 귀부 와인에 이어, 달콤한 아이스와인의 주인공입니다. 리슬링이라 하면 고급스러운 달콤함이 바로 떠오릅니다. 우리가 느끼는 맛과 향처럼 매력적이고 귀족적이고 행복한 삶으로 보이는데 사연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리슬링은 무난하게 잘 자랍니다. 그러다 보니 따뜻하고 비옥하면 열매가 너무 많이 열려요. 와인용 포도의 수확량은 다다익선이 아니기에 많이 열리면 맛과 향이 옅어집니다. 그래서 좀 힘든 조건에 두면 좋은 와인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무한대로 발산합니다. 척박한 토양에, 물이 잘 빠지고, 일교차도 크고 서늘한 곳에 두면 천천히 풍미를 갖춰가며 훌륭하게 성장해요.
오는 비 그대로 다 맞고, 눅눅하고 습하게 지내다 보니 곰팡이에 습격당하고, 이제 좀 살만한가 싶어지니 물 한 방울 없이 메마른 날씨에 뜨거운 햇빛까지 내리쬡니다. 썩어서 죽지 않은 게 다행이지만, 잔뜩 여윈 채 살아남은 모습은 애처롭습니다. 먼 친적이지만 같은 집안인데 과즙을 듬뿍 품고 영롱하게 빛나는 샤인머스캣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에요.
악천후와 병충해를 피해서 온실 속에서 애지중지 곱게 자라는 포도가 있는가 하면, 리슬링은 한겨울 혹한 속에서 얼어붙기를 기다려 수확합니다.
야구가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듯, 삶도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올해 수확해서 바로 신선한 와인으로 데뷔하고 세상에 알려지는 가메와 보졸레 누보도 있지만, 고된 여정 끝에 완성하는 귀부 와인, 아이스와인도 있습니다. 자칫 흉터로 남을 수 있는 상처를 고귀한 달콤함으로 승화시킨 리슬링이 기특하다 못해 존경심마저 느껴집니다.
겨울에 핀 꽃, 언젠가 봄이 오면
사주를 보러 가면 언제나 듣는 이야기입니다. 제 사주는 겨울에 핀 꽃이라고 해요.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춥고 외롭답니다. 그래도 꽃이라고 하니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위해 노력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수확 전의 리슬링으로 살아야 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황금빛으로 찬란한 내 삶은 진정 농밀하게 달콤했다고,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유명 넘버 <지금 이 순간>의 가사가 더욱 절실하게 와닿는 오늘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jIts3GCVrY
아이스와인을 생각하면서 원래 준비한 곡이 있었어요.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의 <알 수 없는 그곳으로>입니다. 남녀 커플의 듀엣으로 유명한 넘버죠. 뮤비에서는 겨울을 배경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리지널 버전을 듣고는 거기에 푹 빠져버렸어요. 드류 사리히와 리사 안토니가 부른 <So viel mehr>는 저작권 문제로 두 사람의 무대 영상이 보이다 안 보이다 해요. 번안곡은 설레는 감정을 매끄럽고 부드럽게 담았어요. 오리지널 버전은 거친 운명으로의 위험한 유혹이 느껴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2R-a1SRXds
https://www.youtube.com/watch?v=lBOBLfMrz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