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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Oct 12. 2024

황금빛 달콤함, 귀부 와인

#곰팡이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아하고 기품있게 

매시간 공부하는 품종으로 만든 5~6잔의 다양한 와인을 시음할 때면 입안에서 굴린 후 대부분 스핏 통으로 갑니다. 소량이지만 공복에 술이 들어가면 수업 내내 졸릴 테니까요. 잔에 든 나머지 와인도 수업을 마치면 모두 버립니다. 그런데 따라준 와인을 남김없이 마신 적이 몇 번 있어요. 그럴 때면 평소 귀엽고 앙증맞게 보이던 시음용 와인잔이 너무 작아서 아쉽습니다. 귀부 와인 시간에도 그랬어요.


파인애플, 망고, 복숭아, 살구, 배, 꿀, 아몬드


미인들의 가장 예쁜 이목구비를 각각 모아 합성했더니 아름답지 않은 얼굴이 나왔어요. 흠잡을 데는 없는데 매력과 개성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움도 없습니다. 감동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와인은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정말 맛있는 여러 과일들의 깊은 달콤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복합적이면서도 고유한 매력을 자아냅니다. 한 모금으로도 느낄 수 있어요. 


까다로워서 귀한 와인  


귀부 와인의 재료는 건강한 포도는 아닙니다. 곰팡이가 피고 많이 쪼그라들어 있죠. 모르는 사람이 포도 모양만 봐서는 못 쓰고 버리게 생겼어요. 그런데 이 상황은 까다로운 조건을 여럿 만족한 결과물입니다.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라는 균이 있어야 해요. 이 곰팡이 균이 포도 껍질에 미세한 구멍을 만드는데 그 틈으로 수분이 증발하면서 포도의 당분이 농축됩니다. 그럼 이 포도로 만든 와인은 달콤하겠구나 예상이 되지요.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기 때문에 '귀한 부패', '귀부' 와인의 캐릭터가 생깁니다. 보트리티스가 포도에 번식할 때 특유의 풍미가 생성되는데 덕분에 완전히 다른 차원의 와인이 탄생합니다. 


타이밍도 중요해요. 포도가 알맞게 익었을 때, 마침 습한 날씨가 조성되면 아주 잘 번식합니다. 그러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건조한 날씨와 충분한 햇빛이 필요해요. 그래야 포도가 썩지 않고 자연스럽게 쪼그라듭니다. 포도가 덜 익은 상태에서 균이 침투하거나, 습한 날씨가 과도하게 지속되면 건조가 아닌 부패가 됩니다. 


날씨는 예측만 가능할 뿐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하늘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주기를 바라야 하는데 지구 상에서 그런 곳이 얼마나 될까요. 아니, 있기는 할까요. 


지리책에 나오듯이 설명하면, 이런 환경은 따뜻하고 느리게 흐르는 본류에, 반대 성격인 차갑고 빠른 지류가 합류하는 지역에서 가능합니다. '가론' 강에 '시론'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어요. 프랑스 보르도의 소테른 지역입니다. 


다른 지역은 운에 기댈 수밖에 없어요. 수확기에 비가 오면 포도가 상하기 전에 서둘러 거둬들이는데 일부러 조금 남겨두기도 해요. 행여나 맑고 건조한 날씨로 바뀌면 귀부 와인을 만들 수 있는 귀한 포도를 얻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세미용, 소비뇽 블랑, 슈냉 블랑, 리슬링 등


까다로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레드 품종은 귀부 와인에 지원할 수가 없어요. 보트리티스와 협업 작용이 좋지 않거든요. 풍미도 좋지 않고 색상도 망가집니다. 껍질이 얇고 송이가 촘촘해야 하는 자격 요건을 충족하는 화이트 품종은 일단 서류 합격입니다. 여기에 빈티지, 기후와 날씨, 포도알마다 보트리티스의 영향을 받는 정도도 제각각이라 넘어야 고개가 많아요. 


포도가 쪼그라들었으니 수확량이 줄고 와인 생산량도 적어집니다. 곰팡이 공격에 시달리고 당분까지 높아진 포도는 발효가 어려워 불안정한 상태에 발효에 필요한 시간도 길어집니다.


고통을 견디면서 맞이한 기쁨의 날


여정이 고생스럽고 험난했다는 것만으로는 안타깝지만 세상의 인정을 받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성취가 있어야 빛이 납니다. 귀할 귀(貴), 썩을 부(腐), '귀부'는 '귀하게 썩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Noble rot'이라고 해요. 귀부 와인의 달콤함은 일반적인 단 맛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해요. 품위 있다고 해야 할까요. 우아하고, 실크 같은 부드러움에, 다양하고 복합적인 풍미의 조화는 아름답습니다. 


썩고 말라서 잔뜩 쪼그라진 포도를 보면서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게 무엇이든 중간에 성급하게 보고 폄하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내면에서 어떤 잠재력과 가능성이 자라고 있을지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으니까요. 비 맞고, 곰팡이에 시달리고, 메마르고 지친 어느 날, 포도가 혹여 자신의 모습을 보고 좌절해서 생을 포기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입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말고, 즐거운 날과 기쁨의 날이 올 거라 믿고 기다려요.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고귀하고 품위 있게 내면을 갖추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내 삶을 시험했던 저주가 스르르 풀리면서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게 될 거예요. 



https://www.youtube.com/watch?v=94RL7JqNuD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김순영



https://www.youtube.com/watch?v=bu9_3RXOAu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손혜수 송기창 김주택 신상근 (차이나는 클라스)



https://www.youtube.com/watch?v=Nnu7g5rMUmc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이응광 & 코리아남성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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