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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Feb 06. 2024

섹시한 클래식, 빨간 맛

#빨간 맛 #레드벨벳 #서울시향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본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디카프리오의 영화만 보고 책은 안 봤다고 했더니 그즈음 생일이던 내게 후배가 선물로 주었다. 후배는 평소 센스 있는 배려가 넘치면서도 정작 앞에서는 ‘오다 주웠다’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날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사연을 물었더니 책을 고르면서 무척 고심을 했단다. 번역본이 많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 사서 읽어보고 줄 수도 없는 일이라 인터넷 리뷰를 샅샅이 읽었나 보다. 성공한 CEO 이야기만 즐겨 읽는 공돌이가 번역에 따른 뉘앙스 차이가 주는 묘미를 가려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주 신박한 리뷰를 발견해서 고민을 단 번에 해결했단다. 결론적으로 내가 받은 책은 ‘날라리 모범생’ 스타일로 번역한 책이었다. 듣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모범생이 번역한 책은 지루할 테고, 날라리가 번역했다면 깊이가 다소 아쉬웠을 부족함을 적절하게 맞춘 균형이었다. 


그렇게 읽은 책은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순서를 바꾸어 책 먼저 읽고 영화를 봤으면 더 좋았을 듯싶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 모처럼 찾아보니 이 책의 번역에 대한 글은 여전히 많이 검색되는데 번역본이 10가지 버전이 넘는가 보다. 모두 찾아 읽어보며 비교할 호기심이 들기에는 너무 많아졌다. 그러느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원서를 보는 게 낫지 않나 싶은데 이 또한 요원하니 내게 있어 <위대한 개츠비>는 놀 줄 아는 1등 스타일로 번역했다고 짐작되는 그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일듯싶다.



SM 'STATION' '빨간 맛 (Orchestra Ver)' 디지털 커버 이미지 /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지난여름, 저녁 8시나 되어야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던 무더운 저녁이었다. 그러다가 더위를 잊게 해주는 아주 뜨거운 곡을 들었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듯한 멜로디인데 전혀 다른 분위기로 연주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상황을 파악하는 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곡의 정체를 파악했을 때의 그 짜릿함은 아주 제대로 된 빨간 맛이었다. 레드 벨벳의 <빨간 맛>을 서울시향이 연주한 편곡이었다. 영화 음악도, 고전적인 팝도 아닌 걸그룹 댄스곡을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시도하다니 어딘가 모범생의 도발같이 들렸다. 평소에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우리 반 1등이 축제에서 치어 리어가 된 느낌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tpWTRCQ6Hg


두 곡을 비교하고 싶어서 이 편곡의 오리지널 버전을 처음으로 찾아봤다. <빨간 맛>의 도입은 TV를 시청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먹방이 대세인 몇 년 동안 매운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곡이라 이제는 안 나오면 허전할 정도지만 정작 ‘빠빠 빨간 맛 궁금해 Honey’ 이상을 들어본 적은 없다. 걸그룹의 댄스곡은 역시 상큼 발랄했다. 그런데 서울시향의 <빨간 맛>은 묘하게 매력적이다. 화끈한 댄스보다 가만히 앉아서 진지하게 연주하는 단원들의 표정이 더 섹시하다. 금지된 것을 하는 듯한 인상에서 오는 은밀함과 짜릿함일까. 모범생의 일탈과 도발은 내게 더 빨갛게 다가오며 무더운 저녁을 더욱 후끈하면서도 동시에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한겨울에 듣는 서울시향의 <빨간 맛>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 다시 들어본다. 


문학, 음악 등 많은 예술 분야에서 모범생들이 도발과 일탈을 자주 해주면 좋겠다. 내재된 엄청난 매력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해봄직한 시도가 아닐까. 품위를 지키면서도 틀을 벗어나는 시도의 절묘한 균형점, 그 지점이 아마 대중의 마음을 여는 마스터키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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