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빈 May 15. 2024

내게 빛이 된 한 문장, 스승의 지혜

#스승의 날 #You raise me up

초등학교 3학년, 평생을 번거롭게 할 난치성 지병의 진단을 받던 순간이었다. 당시 큰 증상과 불편이 없었던 나는 대학병원 진료실에 앉아 있다는 상황 자체가 공포였고 그저 그곳을 서둘러 나와 800냥 하우스에 가서 맛있는 분식을 먹고 집에 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일상생활에서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마음이 지치기 시작했다. 아홉 살 당시 의사와 엄마가 주고받던 짧은 대화가 떠오른 건 시간이 꽤 흐른 뒤다.  


"아이가 이쁘고 똑똑하니까 신이 질투를 하나 봐요."


나는 특별히 이쁘지도 않았고 몇 분간의 외래 진료는 내가 똑똑한지를 가릴만한 충분한 시간도 아니었다. 그러나 젊은 엄마를 달래며 중년의 의사가 건넨 이 한 문장은 이후 삶의 구석구석을 잔잔하게 파고드는 스트레스와 함께 살아가는 나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문장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순간도 많았고, 아예 잊고 살았던 시기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 말을 건넸던 의사만큼의 나이가 되어 삶을 돌아보니 신이 질투할 만큼 즐겁고 열심히 살아온 날들이 많았다. '선생님'이 두루 흔하게 붙이는 단어가 된 요즘, 오늘 '스승의 날' 만큼은 귀하게 아껴서 그분을 부르고 싶다.  


"의사 선생님, 그때 건네주신 말씀 덕분에 원망하거나 자책하는 마음 없이 밝고 행복하게 잘 살아올 수 있었어요. 앞으로는 신이 질투를 넘어 저를 부러워할 만큼 빛나게 살게요. 감사합니다. "




중학교 3학년 가을이었다. 각 반마다 꽤 많은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어느 특목고의 입학시험날이었다. 공부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거의 시험을 보러 간 분위기였다. 그날의 교실 풍경을 기억하는 이유는 나는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어 시간, 선생님이 옆을 지나가시다가 따뜻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수빈이는 소신이 있구나."


혹시 행운의 여신이 내게 웃어주었다면 나도 합격을 기대해 볼 만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합격이 문제가 아니라 통학버스를 비롯해 대학생보다 더 많이 들어가는 비용은 집에 부담이었기에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이벤트에 참여해 보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날 교실에 앉아 있는 상황이 어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의 절친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우리 딸 외고 다닌다고 말하고 싶었던 엄마의 바람으로) 가까스로 합격을 했으나 평생 가장 후회하는 결정이 되었다. 5지망으로 선택한 외국어에는 도저히 흥미를 가질 수 없었고, 전교 석차로도 받아본 적이 없는 등수를 학급에서 받은 이후 공부를 놓아버렸다. 


그날 행운의 여신은 친구들의 시험장에 가지 않고 내가 남아 있던 교실에 있었다. 모든 사정이 훤하게 보였을 국어 선생님, 어린 자존심을 지켜주시고 어른스러운 결정을 지지해 주신 그분이 내게 찾아온 행운의 여신이었다. 




대학교 4학년, 남은 교양 수업을 경영대 과목들로 채웠다. 취업과 사회생활을 앞두고 인문대보다는 상경대 전공이 환영받던 건 그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둘 듣다 보니 흥미로웠다. 진작에 경영학과로 갈 것을 하는 뒤늦은 아쉬움마저 들었다. 인문학적 고찰의 네버엔딩스토리에 비해 경영학은 구조가 매우 깔끔했다. 오래 묵은 학관의 낡은 책상과 의자에서 <순수이성비판>을 넘길 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구수하고 퀴퀴한 다락방 냄새가 나는 듯했다. 


핸디코트와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경영대 신관 건물은 강의실 구조도, 책상과 의자도 대기업의 강연장 같았다. 장소에 너무도 어울리는 한 분이 들어오셨다. 깔끔한 슈트를 입고 등장하신 그분이 마이크를 켜고 말씀을 시작하신다. 방송국 아나운서실 실장님 같다. 낭랑하고 지적인 목소리 톤은 단연코 130여 학점을 들어온 4년 동안 최고의 집중력을 이끌어주신다. 그렇다 보니 수업 시간이 기다려지고, 수업 내용도 재미있고, 팀 과제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타과 전공생들이 모인 하이브리드 우리 팀은 팀워크가 좋았다. 리서치, 전략, PPT 제작 담당자가 신속하게 정해졌고, 중고등학교 방송반을 지내온 내가 발표를 맡게 되었다. 대망의 과제 발표가 끝나자 교수님께서는 향후 내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피드백을 주셨다. 


"방송국 신입 아나운서처럼 발표를 아주 잘했어요."


목소리가 멋진 교수님께서 해주신 칭찬은 과제 내용이 훌륭했다는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한 일이었다. 발표를 잘한다는 자신감이 탑재된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프레젠테이션을 두려움 없이 잘 해내고, 그러다 전문 프리젠터와 프리랜서 MC에 스피치 강의까지 하게 되는 커리어를 쌓게 된다. 스승님의 말씀은 제자의 인생에 이토록 큰 울림이 되었다. 


교수님께서는 실제로 더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울림을 주고 계신다. 위로와 용기, 희망을 담은 아름다운 음악으로 외롭고 지친 누군가의 마음에, 그늘지고 소외된 세상의 한 모퉁이에, 어두운 우주에 빛을 주신다. 아름다운 말씀으로 숨겨진 재능에 듬뿍 물을 주어 꽃피우게 해 주신 그분의 음악이 지금은 나에게 예술적인 영감과 자극이 되고 있다. 


하이브리드 팀으로 A+를 받았던 제자가 앞으로는 세상에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전하며 보답하겠습니다. 교수님,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그대는 훌륭한 프리젠터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