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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클로징, 그 목적지는

# 때로는 건조하게 # 때로는 훈훈하게 # 언제나 사람을 향하여

by 은수빈

발표 준비를 마무리할 무렵 자주 등장하는 문의가 있습니다. 강연처럼 마지막에 여운을 남기고 싶은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은 지예요. 답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인데, 어떻게 다른지 보겠습니다.




강연처럼 훈훈하게 감동과 여운을 주는 마무리 멘트를 하고 싶다면


해도 됩니다. 몇 가지 조건만 맞는다면 좋은 마무리가 됩니다.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본전도 못 찾고 독이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발표자는 어서 끝내고 싶은 마음에 후반부에서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했는데, 빨리 마치기를 바라는 건 평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발표자는 내 것만 하면 그만이지만 심사위원은 긴 시간 동안 여러 발표를 집중해서 들어야 하거든요. 내용은 다 전달받았으니 어서 질의응답하고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다음 발표 순서 전에 이번 발표의 평가 점수도 고민하고, 커피도 마시고 싶고, 화장실도 다녀와야 하고, 조금이라도 숨을 돌리고 싶어요. 평가 위원 한 번만 해보면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프로젝트를 여러 번 발주한 곳에서 발표할 때는 핵심 위주로 간결하고 건조하게 합니다.


그런데 발표자가 뭔가 가득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서 있으면 인내심이 출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다시 귀를 열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변명을 말하거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격언을 인용하며 시간을 끌거나,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동안의 소회를 밝히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점수에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네, 네, 알겠습니다." 하고 어서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발표 듣고 제안서 보고 결정하는 게 하루이틀이 아니라 밥먹듯이 익숙한 곳이라면 속도감 있게 압축해서 군더더기 없이 진행하는 게 좋습니다.


감성적인 접근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주로 그런 업체를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수주하던 한 회사의 담당자가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최종 의사 결정권자가 일반 회사의 경영진과는 다른 분위기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중년 이상의 터프한 남자 임원들이나 공무원을 대상으로 영업하던 업체에게 이번 제안은 상당히 이색적이었습니다. 모두 여자분이고, 연세가 지긋하신 그분들은 바로 수녀님들이셨어요. 가톨릭 단체에서 발주한 건설 프로젝트였던 겁니다. 그분들에게는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이고 더욱이 발주하는 사업의 전문 용어도 생소하실 테니 기존에 하던 방식 그대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상대의 정서와 눈높이에 맞추는 게 전략입니다.


제안 요청을 위한 사전 미팅 때 파악하고 온 정보와 분위기를 바탕으로 세운 전략은 기존의 발표를 그분들의 정서에 맞게 번역하는 거였습니다. 미리 제출하는 사업계획 제안서는 기존과 비슷하게 전문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담고, 발표용 자료는 친근한 느낌이 들도록 많은 부분을 편집하고 고쳤습니다. 이런 경우 발표의 기회가 있다는 게 참 다행입니다. 제안서에 담을 수 없는 부가적인 설명을 말로 전할 수 있으니까요.


먼저 전반적인 흐름의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발주에서 중요하게 봐야 하는 점에 대한 쉬운 교재처럼 만들었죠. 그리고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이 업체의 경쟁력을 간결하게 쓴 뒤 근거를 반드시 제시했습니다. 건설 용역을 처음 접하는 사람을 위한 접근이었습니다.


전문 용어를 일반적인 말로 쉽게 번역했습니다. 이때 제가 많은 기여를 했어요. 제가 못 알아듣는 부분은 당연히 수녀님들에게도 어려울 테니까요. 조사와 동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업계 전문 용어라 시간이 좀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세련되고 전문적인 한자식 표현보다는, 이해가 빠르도록 전달력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터파기 작업할 때 생기는 분진""땅을 팔 때 날리는 흙먼지"로 쉽게 고쳤습니다.


다른 업체들과 달리 이번 발주처의 특성을 고려해 남달리 중요하게 여기리라 예상되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부분을 충족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의 안전, 민원 처리 등은 업무에 동반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데, 성과와 효율 못지않게 인본주의적 경향을 띠는 그분들의 직업적 특성상 걱정이 많을 것 같아 이 부분을 보다 안심시키기로 했습니다. 원래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던 멘트였습니다.


"해당 사항은 매뉴얼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상황을 통제하며, 신속하게 대응하겠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폐 끼칠까 근심 걱정이 많은 수녀님들에게는 업체가 이 부분에 대해 인지하고 있고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강조해서 자세하게 전했습니다.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전 교육을 통해 안전을 강조하고, 주변에 불편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되 그래도 발생하는 민원에 대해서는 더욱 세심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가장 숙련된 담당자들을 배치할 예정이오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렇게 발주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는 데 비중을 크게 두었습니다.


오프닝과 클로징에 감성을 더하기로 했습니다.


오프닝에는 발주한 건물과 이번 사업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종교적인 의미를 더하여 표현했습니다. 수녀님들의 언어이자 정서이며 삶인 곳으로 주파수를 맞췄습니다.


클로징에는 현장 조사하면서 느낀 점을 넣도록 했습니다. 명언이나 격언보다는 실제로 느낀 감정을 담는 게 좋다고 봤습니다. 이전에 운영하던 건물에 가보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구석의 창틀에조차 먼지 하나 없이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있다는 업체 담당자의 이야기를 마무리 인사에 응용하기로 했습니다. 얼마나 감동받았는지, 그런 배려와 정신을 더욱더 크게 담아낼 수 있는 건물을 완성하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했습니다.


3주 동안 저와 함께 준비하시던 소장님이 처음에는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방식과 표현을 어색해하시더니 점차 괜찮다는 확신이 드셨는지 나중에는 뭔가 더 할 게 없는지 적극적으로 물어오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멘트하실 때 두 손을 모아서 가슴에 품으시면 좋을텐데 하실 수 있는지 표정을 살폈더니 바로 자세를 취하며 거울을 보셨습니다. 영업부서나 마케팅 담당자의 매끈한 달변과 달리, 비록 투박하지만 이 사업에 꼭 참여하고 싶은 소장님의 떨리는 목소리와 노력에서 저는 좋은 예감을 받았습니다.


며칠 후, 수녀님들의 흐뭇한 미소와 박수로 발표를 마쳤고 소장님의 바람은 이루어졌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발표가 정답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리던 것과는 달리 많은 예외가 적용되는 사례였습니다. 논리와 이성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하고, 간결한 표현 대신 길게 풀어서 자연스러운 언어로 대화하듯이 전달했습니다. 경쟁력과 전략 위주로 전하기보다는 리스크 관리와 사후 처리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현장 업무에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너무 바빴던 소장님은 발음 연습, 밀당 스피치는 엄두도 못 내고, 스크립트를 틀리지 않고 읽는 연습만 했습니다. 기준에서 부족한 모든 점을 메운 것은 소장님의 진심과 노력과 열정이었습니다. 제가 본 가장 완벽한 발표였습니다.


어떤 전략이든 출발점은 상대방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여 접근하는 게 중요합니다. 발표의 목적 자체는 비즈니스 거래 성사와 매출 증대일지라도 결국은 사람이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일이기에 궁극적으로는 감성을 터치하는 작업이고, 이를 위한 방법은 얼마든지 열려있다는 것을 끝으로 발표의 클로징, 여기서 저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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