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하루

(소설 1화) 나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에도 계절은 오고 간다.

패어팩스는 그런 곳이다.

그렇게 계절이 회전될 때면, 아침저녁으로 가득 안개를 피어 내었다.

딴 생각에 팔려 계절에도 집중하지 못한 관객을 위한 친절한 시그널처럼.


늘 걷는 산책 길이 사우나 안의 밀도 높은 습기처럼 빽빽했다.

앞이 안 보였지만, 그래도 습관 하나로 걸었다.


빈 속인데, 목구멍 너머가 무언가로 가득 차서, 계속 치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연신 침을 삼키며, 예전에 읽었던 추리소설의 살인사건들을 생각했다.


.. 그 아침, 안개는 새벽부터 피워대었던 노인의 담배연기를 죄다 모아다가 풀어놓은 듯 무성했다.

밑으로만 가라앉는 것도, 클클거리며 부스럭거리는 것도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출근에 나섰다.

한 걸음 내딛는 바로 앞 땅마저도 안개에 묻혀, 거리 사람들은 모두 발목 없이 걸어 다니는 유령 같았다..


이렇게 머릿 속으로 써 내려가니, 숨이 조금씩 다시 쉬어졌다.

그래도 그 글이 시체를 만나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살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그런 하루가 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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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서야, 밤새 묵음으로 해 놓았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같이 일하는 정변으로부터 텍스트가 와 있었다.

오늘 사무실에 잠시 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핸드폰 묵음모드를 다시 진동으로 바꾸고 나니, 습관처럼 한숨이 나왔다.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아침마다 패어팩스 비엔나 역에서 워싱턴 디씨로 가는 메트로를 타고 출근을 한다.

이전에 일하던 시민단체에서 정 변호사를 알게 되었고, 그 후로 그의 로펌에서 일한 지 이 년 정도되었다.

디씨 메트로 오렌지 라인이 차분하고 차가워 뵈는 화이트 컬러 사람들로 하나둘씩 채워졌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깨끗한 메트로가 사람들이 무게를 더 할 수록, 더욱 가라앉아 조용했다.


바깥은 여전히 안개가 한창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내다본다.

이제 곧 전철이 지하로 내려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면 일부러 스포일러부터 찾는다.

결말을 알고 나면,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매 순간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불운을 앞두고 묘사되는 주인공의 일상이 얼마나 지루할 정도로 아름다운지.

웃음과 그 웃음소리 뒤로 펼쳐지는 풍경, 그리고, 반짝이는 감정들 뒤로 흐르는 음악까지.

어느 것 하나 애틋하지 않은 것 없다.

최대치로 집약된 행복의 이미지는 그래서 노곤하다.

그 행복에 관한 묘사는 결말 앞에 무색하고 쓸쓸해지겠지만,

바람이 도달하기 전, 불어 오는 바람을 감지하면서 타오르는 촛불은 얼마나 흔들리며 애절한가.

그런 감정들을 얼른 쟁여 놓아야 한다.

곧 뻔한 결말이 닥칠 것이고, 그러면 순간순간 외면하고 싶을 것이고,

그럴 때면 저축해 두었던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 모닥불로 틔우고 겻불을 쫴야 할 것이다.


우연히 만났고, 기어이 해내고 말았던 결혼이 이리될 줄 알았더라면,

나 역시, 전남편과 매 순간을 즐기며 달달하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동시에 아니다 하는 생각이 같이 들어서,

죄 없는 머리만 홀로 내 저어졌다.



정변의 로펌 사무실은 디씨의 오래된 구역에 있었다.

전철역이 근처에 있고. 꾸준히 관리된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이 가꿀 수록 관록이 아름다움과 함께 묻어났지만,

그런 만큼 렌트비가 비싸서 로펌 사무실로 들어오는 수입의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같은 작은 규모의 로펌에는 무리가 될 만큼.

그럼에도 정 변호사는 이 사무실만큼은 계속 유지하고 싶어 분투했다.

이곳은 모든 네트워크가 모여 있어서, 정계에 진출할 꿈을 꾸는 그에게 베이스캠프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곳을 기반으로 모든 일들을 조금씩 했고, 그 조금씩 한 모든 것은 그의 이력에 한 줄이 되어 스펙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가 조금씩 한 그 모든 일의 나머지 부분, 즉 여집합을 담당하는 변호사로 그를 보조한다.

자질구레 일이 많지만 상대적으로 쉽고 티가 안나는 것들은 모두 내 몫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생각과 달리 무한하지 않았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고비들을 하나둘씩 넘다 보면 기술이 늘어 난다.

일이 벌어졌고, 내게 닥쳤으니, 어떻게든 해결하고 본다.

그러나, 갈수록 기계처럼 반응하며 해낼수록 향상되는 처리능력에 비해서, 마음은 그에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감정들을 써 버린 거 같았다.

설렘도, 마음 졸임도, 기쁨도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도.


평생 동안 사람이 사용해야 할 희로애락의 양도 주어진 시간처럼 유한하다는 걸,

겁 없이 많이도 써 버린 후에야 알았다.

새로 적립되는 자금 하나 없아 마이너스 상태로 신용불량이 되어 버린 사람은 일생동안 생활고에 허덕이게 된다.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채워지지 않은 채로 방전된 상태로 살아야 하는 사람은 일생동안 허덕인다.

고갈된 부분을 나머지 생애 동안 꾸역꾸역 메꾸어 가야만 한다.

건조하게 말이다.


그래서, 꿈 많고 부지런한 이민 1.5세인 정 변호사와의 동업은 내게도 속 편한 일이었다.

나는 감정을 그리 많이 소모하지 않고, 그의 공사다망한 일상 뒤편에 앉아 조용히 일만 하면 되니까.

일을 하다가 창 밖의 나무나 가끔씩 쳐다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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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도착해서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정 변호사가 반대편에서 문을 먼저 활짝 열며 나를 반긴다.

날 기다렸다며 눈을 반짝이는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정 변호사, 아니 우리 정변이 역변이 되는 순간이다.

이럴 때마다 불길했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정변을 나도 가볍게 대했다.

그리고는 그를 지나쳐 구석진 안쪽 창가에 있는 내 책상으로 갔다.

머리도 네모, 몸매도 네모라서, 직사각형을 세로 세워둔 듯한 레고형 몸매를 가진 정변이 곧 따라 들어왔다.

레고이긴 한데 커다란 교포 버전 곰형이기도 한 정변이 온몸으로 용건이 있다고 티를 내면서도,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리 나오면 , 상당히 큰 껀인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무심하게 외투를 벗어 걸고 의자에 앉았다.

그가 조용히 지켜보다가, 내 책상에 따라 걸터앉는다.

"정변"

싱글거리는 그를 힐끗 보며 조용히 불렀다.

"책상, 뽀개져"

그가 얼른 벌떡 일어나자, 나는 재빨리 컴퓨터를 켜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정변이 자기 자리로 가 버릴 때까지, 절대 쳐다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보통 내가 이리 나오면, 정변은 참지 못하고 주절주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그가 또 오지랖 넓게 수임해 온, 아무도 안 맡는 케이스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사건들은 도대체 돈도 안되고 법적인 논쟁거리가 아닌, 막막하고 답답한 것들이 많았다.

정변은 남들이 꺼리는 케이스야말로 우리에게 적합함을 역설했다.

우리가 도운다면 얼마나 보람찬 일이며, 궁극에 이 로펌의 돈과 명예 축적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나를 설득하는 것이 장차 그가 마주 칠 냉담한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연습인 거처럼, 그는 열과 성의를 다했다.

그가 그럴 때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온 그에게 각가지 컨템퍼러리 한국말을 가르친 것을 후회했었다.


그러던 그가 오늘은 조금 다르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요번 주말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지 않을래요?"

정변은 가끔 역변은 해도, 대부분 조변이고, 드물게 울변인데, 이번에는 광변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정변은 쉽게 물러 날 생각이 없는 듯이 버티고 서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저 당당함으로 보니 영업이다.

나의 주말까지 갈아 넣는 걸 보니, 놓치지 말아야 할 커다란 인맥이기도 하고 말이다.

보통 이런 소규모의 로펌은 한 달에 한 방, 즉, 제대로 돈이 될만한 케이스를 하나만 수임해도 운영된다.

이번 달은 아직 그 한방 분량의 케이스를 수임하지 못했다.

그래도, 주말이라니.


내 표정이 복잡해지자, 정변이 "쎄라?" 하고 나직이 불렀다.

묵묵부답인 나를 다시, "사라?"라고 부른다.

피곤이 몰려온다.

정변은 끼었던 팔짱을 풀고, 내 쪽으로 한 걸음 옮기며 쐐기를 박는 마지막 호칭으로 나를 부른다.

"접시!"

간다. 가.


"정변, 언제 결혼하니? 영업은 원래 와이프랑 뛰는 거야. 예원 씨랑은..."

말을 끝 마치기도 전에, 그가 잘랐다.

헤어졌다고.

정체성이 과도하게 과도기인 이민 1.5세인 우리 정변의 연애사는 굴곡졌다.

따로 노는 그의 언어와 정서가 문제였다.

미국 여자랑 사귀면, 언어는 통하지만 그의 갬성을 이해받지 못하고,

한국 여자랑 사귀면, 그의 정서는 공유되지만 그가 하는 영어적 표현의 어눌한 한국어를 이해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 여자와 미국 여자를 번갈아 사귀다가 번갈아 그들에게 차이고 있었다.

주말에도 쉬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울적해져서 그에게 한 마디를 날린다.

"정변네 이민 올 때, 김포평야에 땅 많던 거.. 안 팔고, 고대로 두고 온 거 말이야. 예원 씨한테 내가 슬쩍 흘릴까?"

김포평야에서 그는 이미 내 방을 나가고 없었다.




#세라, #첫째딸, #버지니아 페어팩스, #파트너는 정변호사, #그는_지_웬수

*사진과 글은 전부 제가 찍고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