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화) 나라는 습관
그림은 주황색과 빨간색을 다른 느낌이 나도록 그러데이션을 하여 꽃을 그린 것이었다.
꽃 속을 아주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그렸는데,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선이 켜켜이 꽃잎을 따라 들어가도록 묘사되어 있다.
그 시선이 궁극에는 암술과 수술의 그 끝에 있는 작은 어둠까지 만나도록 디테일하게 이끌어 갔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 한편에 있었던 그 그림이 기억난다.
그림 속 꽃이 묘하게 여성의 성기를 그린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나체가 그려진 그림들보다 더 외설적으로 보였다.
꽃 한가운데 중앙에는 작은 어둠이 있었고,
한 잎씩 감싸고 있는 꽃잎이 아주 자세히 묘사된 여자의 비밀스러운 곳을 들어가는 동굴의 입구 같았다.
그림을 보면 볼수록, 시선이 그 꽃잎들을 제치고 깊은 곳으로 인도되어 갔다.
보는 사람의 시선을 내내 잡아서, 계속 그 끝을 향하여 집중해 나가게 했다.
그래서 화가는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가는 곳마다 화제를 몰고 다니면서 유명세와 비싼 그림값을 둘러싼 질시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보수적인 화단과 사회가 뭐라 하던 화가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보수적인 화단과 사회가 뭐라 하던 자신의 세계를 추구해 갔다.
당시에는 드물던 외국여행을 즐겨하며, 세계 곳곳을 드나들며 영감을 받으며 스스로의 영역을 넓혔다.
그렇게 많은 여행과 이국적인 경험은 화가의 작품 소재가 되어서, 화가만의 개성으로 발현되었다.
그녀가 자신들의 그림을 수북이 쌓인 작업실을 배경으로 신문과 인터뷰를 하던 사진이 떠오른다.
신문이 세상을 선도하던 시대에 신문 한 면을 전부 차지하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던 그녀의 옆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디씨의 수많은 박물관의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마다 가득한 명화들을 많이 보아 왔다.
그런데도 이렇게 초대받은 집의 식당에서 그 그림을 코 앞에서 보니, 뭐랄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영광스러웠다. ⠀⠀⠀⠀⠀⠀ ⠀⠀⠀⠀⠀⠀ ⠀⠀⠀⠀⠀⠀ ⠀⠀⠀⠀⠀⠀
”이 분이 진.. 수..”
“네, 진수덕, 그분 그림이에요.”
명료하고 정확한 발음의 안주인이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정변의 뒤편에 있는 그림을 쳐다보며 덧 붙였다.
“저 그림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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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하나 그렸을 뿐인데, 미친 듯이 야하다.
위험해 보일만큼.
그런데, 나체의 여인 군락은 어찌 이리 무심하니 담담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특이하다는 생각에 계속 그림을 응시하고 있었나 보다.
안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 ⠀⠀⠀⠀⠀⠀ ⠀⠀⠀⠀⠀⠀
“저는 이 두 점밖에 없어요.”
.. 두 점.. 밖에..?.. ⠀⠀⠀⠀⠀⠀ ⠀⠀⠀⠀⠀⠀ ⠀⠀⠀
”아. 이분 작품을 더 사서 모으고 싶으신가요?”
안주인이 내 말에 방끗 웃었다.
그러고는 얼굴에 웃음기를 천천히 지우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 ⠀⠀⠀⠀⠀⠀ ⠀⠀⠀⠀⠀⠀ ⠀⠀⠀⠀⠀⠀
“엄마예요.” ⠀⠀
세 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저녁식사 모임이 끝이 났다.
정변과 나는 그 집에서 나왔다.
바깥은 따뜻한 공기가 안온하고 느긋하게 밤을 감싸는 게 보였다.
이제 금방 겨울을 앞둔 요 며칠 날씨가 포근했다.
새로운 계절로 향하는 빡빡한 스케줄 중에 짬을 내서 숨을 고르는 것처럼.
현관에서 바깥주인과 따로 몇 마디 인사를 하고 정변이 내가 서있던 차 쪽으로 걸어왔다.
넥타이를 풀어 양복 주머니에 넣으며, 인디언 썸머라 그런지 날씨가 따뜻하다고 말했다.
“삼한사온이란다."
내가 맞받아 쳤다.
정변이 차에 타기 전에 양복 윗도리를 뒷좌석에 놓고, 셔츠의 팔을 걷으며 운전석에 앉았다.
나도 스카프를 풀러 코트 주머니에 넣고, 코트를 벗어 안으며 조수석에 앉았다.
차가 숲길을 조심스럽게 헤쳐 나갔다.
길 양쪽으로 펼쳐진 숲에서 가끔씩 형광빛을 형형하게 내뿜는 동물들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오로지 눈만 파란빛이 감도는 반짝이는 은색을 내뿜으며 사슴 무리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는 밤이면, 유순한 짐승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존 앞에 유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가 구비구비 인적이 드문 숲 속을 벗어나서 큰길로 들어섰다.
긴장이 풀리면서 달달했던 와인의 취기가 그제야 밀려왔다.
길이 편해지자 정변이 한 손을 내가 앉은 조수석 뒤로 올린 채 느긋하게 운전을 한다.
나는 구두를 벗어 두발을 차 싯트 위로 올리고는 코트를 담요처럼 덮어 감쌌다.
“정변..”
“응”
“여자들은 남자가 한 손을 이렇게 올리고 운전하는 모습을 좋아한대.”
“어”
한 글자 경연대회 장원 급제자의 한 글자 스웩이 시작되었다.
그게 얄미워 덧붙였다.
“그보다 땅 가진 남자를 더 좋아하지만..”
“또, 땅.”
두 글자다. 많이 쓴 거다.
“쎄라?”
“응?”
“우리 할머니가 늘 지금 쎄라처럼 앉아 있어. 카우치에서.”
이게 얼마나 편한데.
“정변, 아까 그 네이키드 워먼. 그 나체 그림 아래 정변 보니까, 뭐랄까, 정변이 저렇게라도 꿈을 이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오. 리얼리. 난 쎄라 그 꽃그림 아래 앉은 거 보니까..”
순간, 긴장되어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정변이 말을 이었다.
“오늘 쎄라 스카프랑 딱 매치네. 했어”
넌 이래서 안돼.
평소에 정변과는 서로의 혀에 갈고리를 단 관계였다.
갈구고, 갈구니, 갈굴수록, 갈구는 자로 잠시라도 짬이 생기면 서로를 못마땅해하여 죽고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술을 전혀 못 마시는 정변이 술에 약한 나를 오늘처럼 방패막이로 써먹을 때면 정변이 다정해진다
내가 해롱해롱 해지면 정변이 말랑말랑해지고, 내가 해실 해실 웃으면 정변은 피식피식 웃었다.
일을 벌이는 자와 일이 무지 귀찮은 자.
나대는 자와 대인기피 심한 자.
프로 기 빨러와 쉬이 털리는 자.
그 둘이 오직 평화를 외치며 크로쓰 하는 이런 순간은 드물게 온다.
그리고, 유일하게 온갖 개인 영역의 솔직한 정보들이 오가는 타이밍이기도 하다.
정변네 가족이 이민 올 때 한국에 두고 온 김포의 넓은 땅 이야기도 이럴 때 나왔다.
오늘의 화제는 자연스레 우리가 방문한 특이한 집에 관한 것으로 이어졌다.
두 말할 필요 없이, 그 부부는 부와 인맥과 지위를 가졌다고 한다.
저녁 내내 특별히 별 말이 없으셨던 저택의 바깥주인은 과학자로 그 분야에서는 유명한 분이라고 한다. 몇 개나 되는 특허를 가지고, 주로 의료분야에 굵직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이끌고 있다고 했다.
예상한 대로의 배경 이야기에 묵묵히 듣고 있던 나는 화가 안주인에게로 화제가 흐르면서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그림이 유명하고 꽤나 잘 팔린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문이다.
유명한 것까지는 어찌 이해가 되었지만, 뱀 그림이 잘 팔린다니 말이다.
가만히 쏟아지는 정보를 수렴하던 나는 얼굴이 절로 돌아가서, 정변을 쳐다보았다.
잘 팔리는 게 맞다고 한다.
그것도 비싼 값으로 말이다.
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상상하는 것 만으로 몸이 뒤틀리는 듯이 징그러운 존재 아니신가.
커다란 벽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크기의 화면에, 그렇게 서로 얽힌 뱀들을 생생히 묘사한 걸 사서, 집에 걸어 놓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예술을 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변”
“응”
“어떤 사람들이 그림을 살까?”
“음”
“얼마나 삶이 윤택하고, 얼마나 일상이 그늘이 없고,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에 질려야, 그런 그림을 그리고, 사고 그럴까?”
“뱀?”
차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밖이 어두워 보이는 것은, 창을 내다보는 내 얼굴뿐이었다.
그녀가 우리 사무실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사진과 글은 스스로 찍고, 썼으며,
#첫번째 그림은 아니쉬 카프어, 마지막 그림은 앙리 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