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일어난다. 살아온 삶과 상관없이

(소설 4화) 나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그림도 그림이지만, 생활의 냄새도 이 집에는 없었다.

집마다 사람의 냄새가 난다.

강약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생활의 냄새가 집에 배이게 되어 있다.

미국인이 살면 미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느낄 수 있고, 인도인이 살면 인도인의 습관이 엿보이고,

한국인이 사는 집은 한국사람만의 생활이 어쩔 수 없이 집에 밴다.

그런데 이 집은 그런 흔적이 없었다.

치우고 닦고 가꾼다고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머무는 곳에 늘 함께하는 삶의 너절한 일상이 엿보이지 않았다.

이 집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그림들을 위한 저장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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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감이 별로 안 느껴지는 큰 부엌을 지나서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그곳은 뱀 그림들로부터 해방된 장소였다.

빈 벽도 보였으니까.


이 곳에도 역시 그림이 양쪽 벽에 각각 걸려 있었다.

숲을 배경으로 나체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그림이랑 꽃을 디테일하게 그린 그림이었다.

나도 모르게 조그맣게 한숨이 나왔다.


식탁 위에는 안주인이 주문해 가지고 온 여러 종류의 초밥들이 커다란 쟁반에 담겨 중앙에 있었다.

각각의 의자 앞에는 세팅된 하얀 접시와 냅킨이 정갈해 보였다.

정변과 나는 각각 주인이 인도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나는 붉은 빛깔의 꽃 아래 자리에 앉고, 정변은 일군의 나체 여인들 그림 아래 앉았다.

여인들 아래 앉아 있는 커다란 레고형 몸매의 정변을 보면서 오늘 정변이 계를 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이닝룸 안에서는 그림들 때문에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

식탁에 앉으며 안주인이 와인을 하겠냐고 물었다.

정변이 자신은 운전을 해서 사양하지만 다들 드시라며 권했다.

또, 내가 와인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내가 언제.. ⠀⠀⠀⠀⠀


“쎄라는 어떤 와인으로 할래요?”

안주인이 묻자마자 정변이 얼른 나 대신 답한다.

“쎄라는 달달한 거 좋아해요,”

나를 아는가.. ⠀⠀⠀⠀⠀


와인이 나오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오가니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졌다.

로펌을 찾아오는 부류는 다양하고 자신의 문제를 의논하는 방법 또한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

이런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사람의 소개로 움직인다.

겪어 본 사람들의 추천으로 한번 걸러지면, 그들을 식사나 소셜 이벤트로 초대해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들 나름대로 축적된 경험과 길러진 촉으로 관찰하여 두 번 거른다.

그리고 결론이 나면 따로 시간을 내어서 정식으로 로펌을 찾아온다.

그때에 가서야 그들의 문제를 들을 수 있다. ⠀⠀⠀⠀⠀ ⠀⠀⠀⠀⠀

나는 오늘 여기서 정변을 잘 팔면 된다.

그가 얼마나 성심성의껏 일하며, 지금까지 그가 이긴 케이스가 몇 건인가를 강조하면 되는 일이다.

그가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들을 얼마나 노력하여 드라마틱하게 극복했는가를 에피소드를 섞어서 언급한다.

팩트를 중심으로 강약을 조절해가며, 무심한 듯 그가 그간 쌓아 놓은 인맥도 슬쩍 들썩이면 좋다. ⠀⠀


“쎄라가 사람들 상담을 잘한다고 들었어요.”

정변을 팔아먹기 위해 몸을 풀고 있는데, 화가 안주인께서 공을 내 코트로 넘겼다. ⠀⠀⠀⠀⠀ ⠀⠀⠀⠀⠀

“맞아요. 쎄라한테 상담받은 사람들은 다른 변호사 말고 꼭 쎄라만 찾았어요. 바빠도 기다린다면서요.”

정변이 맞장구를 치면서 말을 이어간다.

“한국인 시민단체에서 Pro Bono (공익변론: 일 년에 몇 시간 의무로 해야 하는 자원봉사)하게 되면, 쎄라만 기다리는 사람들 있었어요."

그가 말을 이어 갔다.

"돈 안 받는 곳인데도, 쎄라 밥 먹으라고 돈을 억지로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가고 그랬어요. 형편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들인데도 말이죠."

한번 그랬다.


두 부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 주인이 내 잔에 와인을 계속 부어 주었다.

달달한 아이스와인이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다.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왜 그랬다고 생각해요. 쎄라?” ⠀

안주인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상하게 공이 자꾸 내 코트 쪽으로만 떨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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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네 사람은 실상 테니스 복식경기를 하는 것 같았다.

주인 부부가 한 팀, 또, 나와 정변이 한 팀이 되어서 공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저쪽의 공격수인 화가 안주인께서 계속 내 앞으로 스파이크를 날린다.

우리 로펌의 주전은 정변이라니까.


나는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이 피곤했다.

에너지 남아도는 정변을 중심으로 굴리고 싶었다.

정변은 어르신들 좋아하는 아이비 대학과 명문 법대를 나온 수재로서,

그의 한국어 실력에 비해 영어는 완벽하다 못해 코트가 좁다고 날아다닐 터이니,

제발 그의 코트로 공을 날리시길 바랬다.


몇 번을 두루뭉술 피해 가기를 한 끝에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정변이 나를 팔기 시작했다.

나를 자기 로펌으로 끌어들인 이유가 시민단체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호감 때문이라고 덧불을 놓았다.

이제 공은 모두 내 코트로 떨어진다.

나는 화가의 계속되는 질문에 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그 연유를 나름대로 생각해서 말을 꺼냈다.


"모르겠어요. 저도 제게 상담받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저를 선호했는지를.."

"하지만, 살면서 문제에 부딪히고, 곤경에 빠져 어려운 사람들을 그 문제와 분리해서 보려고 해요."

"특히나 가사 사건들 같은 경우에는요."

"많은 가족 내에 문제들은 사람의 인격이나, 살아온 삶과 관련 없이 일어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억울함에 감정적으로 격앙된 사람을 사건에서 분리시켜요."

"이 문제가 이 부당한 삶의 한 자락이, 당신 자체를 딱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그러니 문제를 해결 해 가려고 애쓰기만 하자고."

말을 이어갔다.


"무료 법률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는 상황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의 불운에 대해 고백하는 그 과정이, 그 자체로 절망스러울 수 있어요."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자신이 잘못해서 온 것처럼, 스스로를 이미 많이 질책하고, 질책하며 오죠."

"그래서 상담하는 사람이 의도치 않았는데도, 베푸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라고 느끼기 쉽죠."

"그러면 더욱 서글퍼지고.."

"딱한 사정을 묘사하게 해서 말을 하다 울어 버리게 하는 상담은 저는 최악이라고 생각해요."

많이 겪었다.

힘들 때 나를 위로한다며 내 자초지종을 디테일하게 궁금해하던 사람들에게.


"이미 혼자서 많이 울었는데,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데, 그래도 어찌해 보려고, 간신히 상담을 왔는데.."

"말하다가 울컥 남 앞에서 울기라도 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사람의 마음은 또 얼마나 복잡할까요?"

"사람들을 최대한 자신과 문제 사이에 거리를 두고 보려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존심을 지키게 해 주려고도 하고요. 이런 문제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고. 사건들을 이야기하다가 격해지면, 화제를 돌렸다가 오기도 하고, 안 본 척도 모른 체도 하고요. 스스로 담담히 바라보게 말이죠. 그래서 다음번에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 지를 생각해 보고 오길 바라죠"


너무 길었다.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화가 안주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화장실을 다녀와야겠다.


화장실을 다녀와 내 자리에 앉으려다가 보니 내 뒤에 걸린 그림이 꽤 낯이 익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미술책에서 본듯하다.


"어. 그런데, 이 그림 유명한 그림 아닌가요?"

꺄우뚱거리며 묻는 나를 보며,

화가 안주인이 눈을 두 번째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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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두 번째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

#마지막 그림은 오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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