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그녀는 온탕과 냉탕 사이

by 밈혜윤

온탕과 냉탕 사이

T는... 아니다. 꼬박꼬박 언니라고 붙여야겠다. 그냥 T라고만 하면 언니 안 붙이고 맞먹는다고 직살나게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T 언니가 뭐라고 하면 좀 무섭다. 그녀의 말투는 비록 부드러울지라도 자기존재감 강한 눈코입이 나를 사정 없이 눈치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의 말투가 부드러운 경우 또한 잘 없다. 입만 열면 나를 갈구고 있는데... 어라, 잠깐만. 인간관계가 이래도 되는 거야?


T 언니의 갈굼에는 말 그대로 갈굼 90%, 잔소리 9%, 염려를 잔소리로 표현하는 따뜻한 마음이 1% 정도 있다. 따뜻한 마음이 1%? 너무 적은 거 아닌가 싶겠지만 벌꿀 과자의 벌꿀 함유량보다 높다. 아마도. T 언니는 이걸 보면 야, 내가 너를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주는데, 이게 정신을 못 차리고, 하면서 폭풍 갈굼에 드릉드릉 시동을 걸 것이다. 매서운 갈굼 항아리에도 불구하고 내가 T 언니를 좋아하는 건 아마 1%의 무언가 때문이 아니려나.


T 언니는 내가 바닥을 찍을 때 내 비밀스런 심정을 들어줬고, 맛있는 걸 사먹이고, 소소한 선물을 줬다. 나의 쪼그라든 마음을 듣고 맞는 말만 골라 하며 회초리질을 했지만 심각하게 기분이 상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일단 잔소리를 전방 발사한 뒤에 온정이 담긴 말을 덧붙였으니까. 쉬어도 돼. 힘들어 해도 돼. 맞는 말부터 하고 보는 건 "T"의 방식이려니 한다. 근데 제발 이거 보고 야, 내가 얼마나 공감을 잘 하는데, 같은 소리는 하지 말아요.


목욕탕에 보면 아주머니들이 뜨거움과 차가움에 번갈아 자신을 내던지는 걸 볼 수 있다. 열탕에 있던 것도 모자라 사우나에 들어간 다음에 갑자기 냉수 마찰을 해버리는 광경. T 언니와 있으면 꼭 내가 그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T 언니는 방금 전까지 무지 차가운 말투로 잔소리를 하다가 세상 부드러운 말투로 배 고프니? 맛있어? 한다. 좀 이따가 내가 뭐라고 하면 다시 차갑게 어쩌라고, 뭐, 이런다. 혼란스럽다. 왜 이 혼란에도 불구하고 나는 T 언니를 꼬박꼬박 만나는 거지? 왜 스팀 마사지와 냉수 마찰에 나를 내놓는 거냐.


웃긴 사람

T 언니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이상하게 나를 웃게 하는 웃음 버튼 일화가 있다. 자정이 다 돼가는 늦은 밤 갑자기 T 언니가 대관령에 가겠냐고 카톡을 했다. 언제요? 내일. 너무 당황스러워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소리내서 카톡을 읽었다. 내일...?


일정이 있어서 T 언니의 제안은 거절했지만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웃는다. 아니 암만 내가 일정이 없는 사람이어도 그렇지, 전날 밤에 내일 여행 가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 웃기고 고마운 마음이다. T 언니는 본인의 계획을 벗어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모르긴 해도 다음날 같이 대관령에 가겠냔 T 언니의 제안, 전날 밤에 인원을 추가해서 본래의 계획과 벗어나는 일은 흔치 않은 기회였을 것이다. 조금 우쭐해졌지 뭐야.


T 언니는 나한테 자꾸 요즘 애들은, MZ들은, 하고 물어 본다. T 언니의 이 질문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그녀도 MZ에 속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나도 요즘 애들이 뭘 하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와 나는 두어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나에게 요즘 애들 운운하기엔 본인도 너무나 젊고 창창하다. 언니, 우리 나이 차이 얼마 안 나는 거 알죠? 물어보면 질린다는 얼굴로 말한다. 어휴, 너도 모를 줄 알았다. T 언니가 질린다는 얼굴을 할 때마다 진짜 질리는 것 같아서 나는 막 웃는다.


내가 혼란스러운 온탕-열탕-냉탕을 왔다 갔다하면서 T 언니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건 어쨌든 만나서 웃는 시간이 있기 때문 같네. T 언니는 웃기다. 얼굴은 안 그렇게 생겼는데 알고 보면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 하는 광대의 자아를 가졌다. 처음엔 너무 차가운 인상이라서 무서웠는데 이제 아무리 무섭게 정색을 하고 있어도 광대 자아의 면모를 아는 만큼 그렇게 무섭지는 않다. 조금 무섭다, 조금...


요즘 친구들이 뭘 좋아하는지 나도 어차피 모를 줄 알면서 자꾸 물어보는 건 인간이 박스 한 구석에 희망을 숨겨놓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T 언니가 더 열심히 노오력해서 요즘 애들이 뭘 하는지 알아오면 좋겠다. 나는 손 안 대고 코를 풀고 싶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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