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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Dec 09. 2021

[언여행] 슬로베니아 여행에서의 기록들

언젠가 슬로베니아

   '전통' 나룻배에서.

   코로나가 제대로 알려지기 직전, 2020년을 열어 젖히는 겨울에 우리 가족은 동유럽으로 패키지 여행을 다녀왔다. 말 그대로 코로나 폐쇄 직전에 '문을 닫고' 다녀온 여행이었다. 패키지 여행답게 짧은 일정 동안 수 개의 나라를 건너다니며 알짜배기 관광지를 콕콕 찍어 보았다. 모차르트 생가, 부다페스트 시청을 비롯해 멋드러진 공간을 수없이 많이 봤지만 여태 기억에 남는 건 어이 없게도 한 척의 나룻배와 뱃사공이다.


   동유럽 슬로베니아의 유명 관광지 블레드 섬은 블레드 호수 한 가운데에 있다. 섬으로 들어가려면 플레트나라는 전통 나룻배를 타고 가야 한다. 전통 나룻배라는 표현에 걸맞게 직접 노를 젓는 방식이다. 그래서 배가 굉장히 조그마할 줄 알았는데 나룻배가 생각보다 커서 사람 열댓 명이 올라탔다. 그걸 뱃사공 딱 한 명이 온몸을 던져 노를 젓는다. 뱃사공의 리드미컬한 노젓기로 배는 빠르게 호숫물을 가르고 섬으로 다가섰다.


   이렇게 빠르게 배를 끌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를 저어 왔을까. 노련한 뱃사공은 노를 저으며 콧노래까지 흠흠 불렀다. 탑승한 승객의 무게만 어림 잡아 1000kg이 될 텐데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인간 잠재력의 위대함이 놀랍기도 했지만 어쩌다 이 작지 않은 배에 사람을 가득 태우고 혼자 노를 젓는 전통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 더 놀라웠다. 훨씬 빠르고 편리한 모터보트 같은 걸 놔두고 굳이 ‘전통’ 붙은 걸 해보기 좋아하는, 어딘가 불합리적이고 이상한 인간들은 아마 이 직업을 AI가 대체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차라리 완전한 구식으로, 즉 수고로우나 의미 위주로 회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블레드 섬의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에서.

   섬 한가운데에는 성당이 있고 성당의 종을 세 번 울리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도빨이 꽤 좋다는 가이드의 넉살 섞인 말을 뒤로 하고 입장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사족을 못 쓰는 민간구복행위 마니아로서 당연히 종 줄에 매달렸는데 역시 쉽게 얻는 것은 없다던가. 종 소리를 울리기가 힘들었다. 거의 온몸을 던져 낑낑대야 소리가 날락 말락 했다. 특별히 나의 근력 부족 탓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각국 남녀노소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질 때까지 줄을 당기고 흔들고 매달렸으니 말이다. 어거지로 다섯 번 여섯 번을 매달려 세 번의 종소리를 울리곤 극한의 공복 웨이트를 마치고 널부러져 다른 헬스인들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멍하니 다른 사람들 구경을 한참 했다. 여행을 떠나면 사람만 구경해도 재밌다.


   친구들은 세 번 '딱 해서 딱' 울려야 기도빨이 먹히는 거지, 여러 번 시도해서 세 번 끼워맞추는 건 무효라고 농담을 했다. 하지만 전직 개신교 모태신앙으로서 영유아 시절부터 엄마 손 잡고 교회 다닌 짬에서 나온 바이브로 말해보자면 자애로우신 주님, 하나님, 성모 마리아는 인간의 중심을 바라보시므로 몇 번이고 매달린 나의 마음을 어여삐 여기사 소원을 들어주시리라고 믿는다.


   게다가 내가 빈 소원은 들어주지 않을 이유도 없다. 내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빌었고 또 내가 주변 사람들에 행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빌었다. 내 개인의 부귀영화도 조금 빌었지만. 그 정도는 주님이 눈 감아 주시겠지.


   패키지 여행에서.

   우리 가족은 어딜 가든 항상 패키지로 여행을 다닌다. 유럽을 가도 그렇고 하다못해 제주도를 가도 그렇다. 나는 자유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가족과 갈 때는 패키지에 군말 없이 따라나선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가족이 다들 저투입 고효율을 원하는 성격이라 패키지를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내가 알아보는 루트로는 부모님의 취향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패키지는 짜놓은 대로 따라다니면 족하고 짧은 시간에 많이 둘러보기 때문에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패키지 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사람을 관찰할 기회가 많다는 것이리라. 최소 일곱 차례의 패키지 여행 경험으로 보건대 패키지 관광 손님의 99%는 가족 단위 손님이다. 간혹 혼자 합류하거나 부부만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아이들을 대동한 가족 단위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이국의 땅과 물과 하늘, 건물은 아름답고 신비롭지만 며칠씩 같이 버스를 타고 같은 식당에서 밥 먹고 같은 곳에서 사진 찍는 타 가족들을 관찰하는 것도 신비롭다. 사진은 꼬박꼬박 찍지만 말은 거의 하지 않는 과묵한 가족, 아무하고나 대화를 잘 나누는 활달한 가족, 말을 걸어도 웃기만 하는 조용한 가족... 분위기가 무수히 다른 가족들이 한 가이드를 따라 다닌다. 그럼에도 외국에 와서까지 스마트폰에만 눈을 박고 있는 아이를 타박하는 부모님들, 끝내 관광지에서 다투고 조금 있다가 사이 좋게 어느 마트에서 과자를 사며 화해하는 여러 가족들을 보다 보면 사람 사는 게 뭐 그리 다르지는 않구나 생각하게 된다.


   우리 가족은 패키지 여행에서 어떤 분위기의 가족으로 비춰질지 궁금하다. 우리도 꼭 한 번씩은 다투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랬어도 몰려다니면서 가게들을 기웃대며 주전부리를 사먹고 사진을 찍어주며 실컨 웃었다. 실없이 잘 웃고 웃음소리가 큰 우리 가족들은 아마 대체로 즐거워 보였을 것 같다. 핸드폰 사진을 정리하며 오랜만에 그때 사진들을 다시 봤다. 언제 왜 싸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푸하하 웃는 사진들만 남았다. 기억도 그런 것들만 남았다. 다시 가족과 그런 여행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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