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간의 암병동 생활기
2008년은 5년 간의 충무로 영화 스탭을
그만두던 해였다. 9편의 영화에
이름을 남겼지만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취업을 하기 위해 중간 코스로
자취방 근처의 대형병원 보험과 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업무는 간단했다.
환자 진료차트가 쌓인 곳에서
차트를 찾아서 갖다 놓는 것이다.
집에서 가깝고 무엇보다 병원 직원 밥을
1000원에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심지어 야간에 출출할 때는
당직 의료진을 위한 식사를 하러 가기도 했다.
생존과 벌이에 도움되는 일이었지만
영화감독을 꿈꾸며 살아온
내게는 자존심도 상하는 일이었다.
나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깨끗한 셔츠에 다림질한 바지를 입고 일했다.
차트를 들고 병원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니
의사인 줄 알고 인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부러 속인 것은 아니지만
의사란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만족은 금방 끝났다.
"학생! 알바 조끼 입고 다녀!"
자존심 세우려고 알바 조끼를 입지 않고
다니며 병원을 활보하던 내게 불호령이 내렸다.
조끼를 다시 입고 차트를 가지고
오르락내리락하며 저녁에는
광화문 영국문화원에서 고가의 수업료를 내고 영어를 배웠다.
월급 80만 원 받으면서 수입의 절반은
영어공부에 투자했고 1년 간 천만 원을 썼다.
대기업, 외국계 기업에 다니며
교육비를 받던 같은 반 친구들과도
나는 자신감 있게 교제했다.
내면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행위였다.
낮에는 병원에서 알바를 하고
저녁에는 영국문화원에서 영어를 배우며
밤에는 이태원 펍에서 프리토킹 보충수업을
하던 나는 인생 최대의 육적 고통을 겪는다.
병원에서 일한 지 3개월쯤 되던 날,
밤에 복부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 같았는데
얼마 지나자 전화기 들 정신조차 잃었다.
내 시신이 언제 발견될까를 생각하며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졌다.
자신을 억누르며 살던 생활 패턴에 젖어든
나는 복부 통증을 참고 병원으로 출근했다.
내 얼굴을 보고 보험과 간호사 누나가
황달이 왔다며 급히 소화기내과 진료를 잡아줬다.
아는 누나 덕분에 나는 빠르게 진료를 봤고
급성 A형 간염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어떻게 고통을 견뎠냐며
당장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내 진료를 급하게 잡아준 간호사 누나는
6인 병실을 또 예약했다.
그러나 그 병동은 암병동이었다.
3주 간 나는 암병동 6인실에서 지내며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채혈을 위해 매일 새벽 팔뚝에 꽂힌 주사자국으로
양팔 모두 피멍이 들었고 체중은 1주일 사이 5킬로 빠졌다.
부모님께 사실을 알리면
고통이 전가될 거 같아
보호자 없이 혼자서 3주간을 지냈다.
암병동은 예상보다 활기차다.
이 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이기에
오히려 여유가 있다.
맞은편의 60대 암환자는 보험 잘 들어서
일당이 잘 나온다며 병원밥 외에
사식을 자주 시켜먹었다.
암 걸리기 전에는 아끼며 사느라 고생했는데
암에 걸리고 나니 그동안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거라며 내게 암보험은 짱짱하게
가입하라며 권유했다.
암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허영만의 <식객>이었다.
살아 돌아가서 그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이
암환자의 마음이다.
그만큼 항암은 입맛을 떨어지게 한다.
내 입맛도 마찬가지였다.
내 간염수치는 그 대학병원 당시 최고 기록을 세웠다.
간이 상하면 비위가 상해서
밥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다.
2주가 지나가 얼굴에 황달기도 잡히고
내 몸도 마음도 도리어 가벼워졌다.
퇴원 1주를 남기고 나는 이력서를 써서
100대 1 경쟁률을 뚫고 공공기관 PD로 입사한다.
축하의 의미로 퇴원 날 병원 앞에
유명한 냉면집에서 물냉면 곱빼기를 시켜먹었다.
내 입맛도, 살 맛도 돌아왔다.
죽음을 목도하고 넘어봤으니
취업문을 여는 것은 자동문이었다.
고통 후에는 못할 일도 없고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는
삶의 열정이 회복되었다.
그렇게 고통은 내게 낯설지만
의미 있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