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딸에게 사준 책 중에
<폴리애나>가 있다.
홈스쿨 기관 추천도서 중
하나였는데 딸이 읽고
내게 강추한 책이었다.
표지 디자인을 보고
그저 아이들을 위한 책이겠거니
하는 편견 때문에
읽지 않은 책이기도 했다.
그러다 아이가 아닌 어른이 추천한
<감사의 습관>(존 클랠릭)을 읽다가
작가가 추천한 책 역시 <폴리애나>였다.
아이와 어른 모두가
추천한 <폴리애나>를
잠자리에서 곤한 잠을 깊이 들기
위해 집어 들었다.
우리 집엔 티브이가 없다.
가장인 내 원칙 중에 하나는
침실에 스마트폰을 가져올 수 없는
것도 있는데 침대에서 폴리애나를 읽으니
20부작 미니시리즈를 읽는 듯했다.
괜히 이 책을 집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입도가 높았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배경은 100년 전이다.
부모를 잃고 까칠한 이모에게 입양당한
10세 소녀 폴리애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기쁨 놀이'를 선사한다.
폴리애나의 엄마는 부잣집 딸이었으나
가난한 목사와 함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서부지역으로 선교사로 가게 된다.
미국이 워낙 땅 덩어리가 넓기 때문에
같은 나라인데도 다른 지역으로 가면
선교사로 부른다.
폴리애나가 '기쁨 놀이'를 시작한 계기는
선교사 지원 물품에서 장난감을 갖고
싶었는데 장난감 대신 목발을 받은 것이다.
폴리애나의 아빠는 장난감을 받지 못해
실망한 딸에게 목발을 쓸 수 없는
건강한 두 다리가 있으니 기쁘지 않냐고 물었다.
어렵고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는
점을 찾는 것이 그때부터 놀이가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생존 놀이'를 아들과 하며
지냈던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떠올릴 수 있다.
부모를 잃고 대저택에서 살게 된 폴리애나는
인색하고 의무감으로 가득 차 있는 이모,
폴리 해링턴의 지시로 많은 방들 중에
초라한 다락방에서 첫 밤을 보내게 된다.
폴리애나라고 처음부터 기쁘진 않았다.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눈물 흘리던
아이는 다락방에서 기뻐할 점을 찾아냈다.
그림이 없는 대신 창문을 열면
그림보다 더 훌륭한 경치가 나왔고,
교회 부인회 대신 자신의 가족인
이모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이후 폴리애나는 같은 집에 사는
가정부 언니 낸시를 시작으로
주변에 '기쁨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가난하든, 부하든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찬 어른들에게 '기쁨 놀이'를 통해
삶의 질을 확 올린 것이다.
폴리애나는 환자에게 쓰이는 처방처럼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강장제가 된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의사가
폴리애나를 보고 실제로 표현한 내용이다.
폴리애나의 '기쁨 놀이'는
까칠함의 끝판왕인 이모조차
변화하게 만듦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리고 폴리애나는 기쁨을
잃을 뻔한 사건을 겪고
그 대가를 한 번에 받는다.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깨닫게
한 것은 일종의 보험 가입과도 같다.
폴리애나가 받게 된 기쁨의 보상은
어마어마하다.
궁금하면 독서하시길.
100년 전 목사의 아내와 딸이 쓴 책 중에
좋은 책들이 참 많다.
<작은 아씨들>, <톰 아저씨의 오두막>,
<빨간 머리 앤> 그리고 <폴리애나>
이 책들을 쓴 저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삶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고통의 삶 속에서 진실과 감동,
기쁨을 캐내어 독자에게
보여준 이들은 정말 위대한 작가이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은
가치를 적용해줄 수 있는 책이 고전이다.
표지와 책 제목만 보고
구매한 지 1년이 지나 펼친
<폴리애나>는 내게 '기쁨 놀이'를 알려주었다.
폴리애나에 등장하는
환자들만큼은 아니지만
목과 어깨 통증이 있어서
나는 하루 한 시간 산책을 한다.
한 동안 코로나 2단계 때문에
닫힌 야외 농구코트가 문을 열었다.
그 아래 적힌 문구를 읽었다.
거리두기 단계가 1.5단계로 낮아졌고
'코로나 블루'로 인해 힘들어하는
시민들을 위해 체육시설을
다시 개방한다는 것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블루'한 시대에
무지개와 같은 폴리애나를 읽길 참 잘했다 싶다.
지금은 아프긴 하지만
어깨가 나으면 공을 던질 수 있는
멋진 농구코트가 있다는 것이 기쁘다.
햇살 아래 한 시간 걸을 수 있으니
더욱 기쁘다. <폴리애나>를 끝까지
읽고 나면 보행의 기쁨과 감사가
더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