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가는 길에 화분받침으로 쓰인 낡은 신발을 보며
고난이 많았기에 즐거운 이야기를 쓴다.
-루이자 메이 올컷(소설 <작은 아씨들>의 작가)-
순례의 한자 뜻은 돌 순(巡), 예도 예(禮)다.
종교 용어로, 여러 성지나 영지 등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참배한다는 뜻이다.
작가이자 설교자였던 영국의 존 번연은
천로역정(Philgrim's Progess)을
통해 크리스천으로 상징된
신자의 삶을 유혹과 고통을 지나
천국에 다다르는 소설로 유명해졌다.
톨스토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두 순례자 이야기도 유명하다.
당대의 성공한 노인들은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 마감의 인증으로
인정되는 시기였다.
존 번연도, 톨스토이 시대도
아닌데 여전히 순례길을
나서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은 무엇을 찾고자 했던 것일까.
순례길 도중 카페에 화분처럼
놓인 각양각색의 운동화, 등산화에
자리 잡은 꽃들을 본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가 있지만
대부분의 인생은
흙이 덕지덕지 묻은
지저분한 신발처럼 남루하다.
하지만,
화분을 대신한 신발이
명품 구두가 아니라
낡은 운동화 등산화가
더 어울리는 이유가 있다.
낡은 신발이라야 비로소
꽃들에게 화분을 내어줄 수 있다.
윤이 반짝이는 굽 높은 구두가
화분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랜 시간 험한 길을 걸어온 신발은
모습은 초라할지언정 그 자체로 감동이 있다.
농부와 노동자의 거친 손을
바라볼 때의 마음과 같다.
땅에 온 체중을 받아내며
오랫동안 디뎌온
소명을 마치고도
화분받침으로
물을 맞고 바람을 막아주는
신발들을 보며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인생들이 떠오른다.
인생의 파고를 피해
무작정 걸었던 순례자들이
찾아 헤매었던 숭고함은
실은 자신이 신고 있는
그 낡은 신발에 있었다.
나의 인생의 마지막도
화분받침으로 기꺼이
남은 것도 내어줄 수 있는
낡은 운동화, 등산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잘 걸어왔다고, 애썼다고
칭찬받는 결말을 맞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