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아홉 살
1989년과 2019년의 아홉 살
빈곤 속 풍요,
풍요 속 빈곤.
어떤 것이 나을까?
장점은 단점이 되고
단점도 장점이 된다.
1989년 내가 아홉 살 때,
귤이 한 개, 백 원이었다.
바나나는 한 개, 천 원이었다.
2019년 딸이 아홉 살 때,
귤을 한 개만 사는 사람은 없지만
백 원보다 싸다.
바나나는 한 다발에
싸게 사면 삼천 원이다.
통조림이 아닌 껍데기가 있는
파인애플을 처음 먹었던 때도
아홉 살로 기억하는데
제주도 여자와 결혼한 외삼촌이
신혼여행 다녀와서 칼로 껍데기를
조심스럽게 발라냈던 기억이 난다.
천 원짜리 바나나 껍질
하나 까는 것도
조심조심했었다.
그래서 아홉 살이던 나는
바나나킥 과자를 좋아했었다.
바나나가 귀했기에
과자 부스러기를 입 안에
탈탈 털어 넣었고
축구할 때도 바나나킥을
차고 싶었다.
30년이 지나서 귀한 바나나,
귤, 파인애플을 큰돈 들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시대를 산다.
다만, 그 먹을거리를 대하는
애틋함이 사라졌다.
가치가 낮아지니 감사함의
크기도 사라졌다.
주택 구입도 마찬가지다.
높은 이자율에 꼬박꼬박 적금 부어서
내 집 장만하던 감격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빚 없이 대한민국에
집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집 장만에 성공한들,
서민들 사이에서는 방 한 칸만
내 것이라는 웃픈 이야기가
안주거리로 등장하는 것이다.
가난한 시절에는 많은 것들이
부족해서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의식주에 대한 소중함이 컸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 부유한
이 시대에는(내가 부유한 것은 아님)
많은 것들이 넘치지만
상대적 궁핍을 채우려는
갈망은 줄어들지 않는다.
1989년 아홉 살과
2019년이 아홉 살이
만나서 과일을 먹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빠는 아홉 살이라는 차기 작품에
상상으로 펼쳐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