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삶의의미 #애착 #인연
엄마아빠의 시골집 동네에는 길고양이들이 많다. 엄마아빠는 이미 개 네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어 (애정을 주고 책임감 있게 돌보고 있는 반려동물이 이미 충분해서), 집 주변에 드나드는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엄마아빠를 방문했을 때, 상황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수많은 길고양이들 중 두 마리의 자매 고양이에 아롱이와 다롱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고, 비록 집 안에서 기르는 건 아니지만, 마치 엄마아빠의 반려묘처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아롱이와 다롱이를 챙기고 있었다. 아롱이와 다롱이도 엄마아빠를 주인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낮에는 마당에서 쉬고 놀며 애교를 부리며 엄마 아빠와 (특히 엄마와) 특별한 관계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엄마아빠 말에 따르면, 몇 달 전부터 아롱이와 다롱이는 다른 길고양이들과 달리 밥만 먹고 도망가는 대신, 엄마아빠가 관심을 보이면 도망가지 않고 서서히 가까워지려 했다. 그렇게 몇 달 만에 서로의 거리가 좁아졌다고 한다, 그렇게 서서히 수많은 길고양이들 중 하나였던 아롱이와 다롱이는 엄마아빠와 애정을 주고받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아롱이 다롱이를 직접 만나보지 못하고, 멀리서 전화통화로 위의 소식들을 전해 들었을 때는 엄마가 수시로 아롱이 다롱이를 챙기고, 아롱이 다롱이가 오후 늦게까지 나타나지 않는 날 걱정하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길고양이들인데 왜 저렇게 까지 마음을 쓰고 걱정을 하나 싶었다. 한편으로 길고양이들도 저렇게 까지 챙기고 아끼는 엄마가 귀엽고, 동물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 참 예쁘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호주에서 엄마아빠 방문하러 한국에 와서 아롱이 다롱이를 직접 보고, 시간을 보내게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아롱이 다롱이는 나에게도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 아이들은 더 이상 그냥 길고양이 중 한 마리가 아니라, 나와 마음의 온기와 애정을 주고받는, 마음이 쓰이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들이 되었다.
한국의 날씨가 추석까지 한여름처럼 덥다가, 하룻밤 만에 차갑게 변했다. 에어컨을 켜야 하는 후덥지근한 한여름 날씨에서 히터를 틀어야 하나 싶을 만큼 차가운 날씨로 바뀌었다. 어제는 비바람도 몰아쳤다. 나와 엄마는 비바람 몰아치는 추운 밤을 밖에서 보내야 하는 아롱이 다롱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비바람을 피해 쉴 곳이 있는지, 안전할지 걱정이 되었다. 엄마와 지난 몇 주간 아롱이와 다롱이를 집안으로 들여오는 연습을 해봤는데, 길고양이 습성이 배어있어 집안은 답답한지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엄마가 마당에 따뜻한 고양이집을 만들어줬는데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거부반응을 느끼는지 그곳도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어젯밤 아롱이, 다롱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다. 따뜻한 침대 위에 누워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에도 비바람을 피해 떨고 있을 아롱이 다롱이 생각에 마음이 짠해지고, 걱정이 되었다. 아롱이 다롱이는 밖에 내버려 두고 나만 따뜻한 곳에서 안전하게 자는 것이 미안하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롱이와 다롱이가 무사히 밤을 보냈을지 걱정이 되었다. 마당으로 나가봤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 이렇게 내가 아롱이와 다롱이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도 놀라웠다. 예전에는 의미 없는 길고양이들에 불과했을 아롱이 다롱이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쓰이고, 걱정하고, 안달복달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웃기기도 했다. '뭐 하고 있는 거니, 나'.
살면서 맺는 인연과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모든 관계가 이런 게 아닐까. 아무런 의미 없던 누군가가, 내가 이름을 불러주고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들의 안녕과 행복이 내게 중요한 이슈가 되고, 그들로 인해 마음을 쓰게 되고, 걱정도 하게 되며, 때로는 상처받고 슬퍼지기도 한다. 아롱이와 다롱이가 마당에서 한참 놀다가 다시 숲으로 사라질 때면, 그리워지고, 언제 다시 올까 기다리게 된다. 비바람이 부는 밤이면, 밖에서 밤을 보내는 아롱이와 다롱이가 안전할지, 춥지는 않을지, 무섭진 않을지 걱정되지만, 그들이 활발하고 밝게 다시 나타날 때면 이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다. 함께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근심은 잠시 잊고, 그들의 귀여움 속에서 순수한 기쁨과 따뜻함을 느낀다. 아롱이와 다롱이가 주는 기쁨이 클수록,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 느끼는 그리움과 걱정,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은 더욱 커진다. 관계는 이렇게 여러 감정을 동반하는 것 같다. 인생의 다른 모든 경험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엄마 아빠와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호주로 이민을 가고 한동안 한국에 오지 못하다가, 이민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 매년 엄마 아빠를 보러 한국을 방문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몇 년간 보지 못하다가 1년에 한 번씩 짧게나마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니, 엄마 아빠와의 시간이 눈물 날 정도로 소중해졌다. 한국에 머무는 몇 주 동안, 문득문득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일상들이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럴 때면 동시에 슬픔이 찾아온다. '곧 다시 떠나야지. 1년에 잠깐씩밖에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다.' 이번에도 호주로 돌아갈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공허할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렇게 한국에 있는 동안 나는 항상 여러 감정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따뜻함과 행복, 그리고 아린 마음과 슬픔이 쌍을 이뤄 나를 찾아온다.
(덧붙이자면, 우리 가족은 이상적인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은 아니었다. 여느 다른 가정처럼 갈등이 있었고, 서로를 아프게 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여전히 성격 차이로 충돌하는 순간들이 있지만, 해외에 살면서 자주 만나지 못하고, 큰 결심을 해야만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니, 우리 가족 안에 있는 갈등과 아픔을 뛰어넘는 '엄마 아빠의 소중함'을 더 깊이 자각하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 '좋은 면과 나쁜 면', '얻는 것이 있으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고들 하지만, 관계에서 느껴지는 슬픔, 걱정, 상실감, 아픔, 거절감 같은 '불편한 감정들'은 단순히 나쁜 것, 혹은 대가로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일과 관계에는 다양한 감정이 동반되며, 그 불편한 감정들조차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리움, 슬픔, 아픔'은 내가 그만큼 이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증거이기에, 나의 슬픔과 아픔은 아름다운 감정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하는데, 무관심은 결국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삶의 모든 사건들과 관계들에 무관심해진다면, 우리는 삶의 무미건조함 속에서 시들어가고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니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관계야말로 우리 삶에 색깔을 더하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최근에 읽은 책, 관계와 사랑의 심리학의 책 '실수 없이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Serge Hefez' 에서도 인간의 정신과 삶은 결국 관계에서 시작되고,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길고양이였던 아롱이 다롱이와의 특별한 인연, 그 아이들에게 쓰이는 나의 마음, 그 아이들을 보며 얻는 따뜻함과 즐거움을 통해 다시금 실감한다. 인생에서 관계의 중요성을. 또는, 인생에 차지하는 관계의 큰 부분을.
오늘 아침 마당에 앉아 아롱이 다롱이를 기다리는데, 김춘수의 시 '꽃'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