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와 표류, 목적 없는 산책의 즐거움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논할 때, ‘플라뇌르[flâneur]’, 즉 ‘한가롭게 배회하는 산책자’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엔 섭섭하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 ‘플라네[flâner]’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닐다, 배회하다, 돌아다니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샤를 보들레르는 플라뇌르를 일컬어 ‘열정적인 구경꾼’이라 정의했다. 이러한 구경꾼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어디에서나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고,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어야’ 한다.
플라뇌르는 오직 탐색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도시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니는 탐정과도 같으며, 이때 산책은 과정인 동시에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산책 시에는 굳이 소재를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산책 중 떠오르는 모든 아이디어는 크든 작든 상관없이 산책 자체보다 중요하지 않다.
플라뇌르는 모든 가능성을 예민하게 살피고 알아차려야 한다. 부서지기 쉽고 덧없는 찰나의 것들과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변함없는 것들, 일상의 눈을 벗어나 있는 것들, 유행의 미묘하고 점진적인 변화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들, 우연적이고 우발적이며 부조화한 것들, 질감과 정취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 자주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이를 거스르는 바람,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주관적인 모든 것을 살펴야 한다.
산책자의 영토는 도시마다, 그리고 산책자 개인마다 뚜렷이 구분된다. 산책자가 걷는 길의 개념적‧감정적 가치는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풍경 그 자체만큼이나 그 풍경에 대한 해석의 영향을 받는다. 산책자는 도시를 파악하려 하지만, 도시는 매 발걸음마다 변화한다.
트렌디했던 장소는 어느새 한물간 곳이 되고, 어딘가 수상했던 동네는 고급 주택가가 되어 단조로운 건물이 늘어선 곳이 된다. 잠시도 끊이지 않고 동시에 진행되는 이러한 움직임은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춤이다.
이미 존재하는, 그리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는 디지털 기기들 덕에 길 잃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다양한 상품들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지만, 매일의 경험을 너무나 평범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아주 따분한 일로 느껴지게 하고 일상이 품고 있는 맛과 정취에 무뎌지게 만든다. 이를테면 아는 길을 가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자 지도를 확인하다 보면 공간을 지각하는 우리의 감각은 점점 무뎌질 수밖에 없다.
목적 없는 표류가 주는 설렘은 우리의 본능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한 시간만 아무 목적 없이 걷다 보면 탐험의 즐거움이 자연스럽게 발길을 인도할 것이다.
그 즐거움에 이끌려 차양이 드리워진 벤치로 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지형의 구조를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저녁나절의 가벼운 산책이 됐든 본격적인 산악 원정이 됐든 우리가 세상을 항해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 본 포스트는 《실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고양이처럼》의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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