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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선생님 Nov 05. 2022

엄마, 워킹맘, 자존감.

'나'를 먼저 사랑하기.


"정말 열심히 사시네요." 

육아라는 길에 발을 들인 이후, 꽤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였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들었다가, 점점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열심히 살면 안 되는걸까? 아니면, 엄마가 열심히 사는게 남들의 눈에는 보기 좋지 않은 걸까? 아니면, 나 정말 열심히 산다, 그 뜻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사춘기 시절, 교회 오빠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공부의 시기를 놓친 후회가 여전히 남지만, 고등학교 3년을 기숙사에서 갈아 넣을 만큼 열심히 살아왔던 것 같다. 또, 20대 때는 더 열심히 살았다. 지방대에 다니는 것을 보상받고 싶어서, 좋은 대학원에 가고 싶어서, 대학병원에 취업하고 싶어서...앞날의 안정적인 무언가를 꿈꾸며 늘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럴 수록 열등감의 깊이가 점점 좀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몸은 언어치료실 안에 있지만, 정말 야망이 있었던 걸까. 남들에게 더 인정받고 싶었고, 명절엔 두둑한 명절 보너스로 해외여행도 다니고 가족들에게도 조금 더 당당하고 싶었다. 그러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시작한 육아는 우울감과 더욱 더 쉽게 친구가 되게 해주었다.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우울감을 극복하고자 읽었던 자기계발서에 '나'라는 단어를 항상 마주할 수 있었다. 남의식을 하지 말라, 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부연설명에 밑줄을 열심히 긋고 색칠했지만, 정작 실천하는데까지는 5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나와 마주하려면,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해주려면, 먼저 외부의 요소를 차단하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전에 읽었던 최명화 님의 <나답게 일한다는 것> 책에서도 '하기 싫은 것'을 정리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상식적 성공법칙> 책에서도 작가는 먼저 하기 싫은 일을 적다보면 그 안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정규직'이라는 타이틀은 좋아했지만 나는 조직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적인 눈치가 생각보다 덜 발달되어 있다. 서류를 하는 시간이 아까워 서류는 대충하더라도 실무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즐긴다. 치료 자료를 만든다든지, 교재교구 원고를 쓴다든지, 그러한 것들. 그리고 출산 이후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하루에 조금이라도 갖지 못하면, 극도로 예민해진다. 아이에게 쏟을 에너지를 비축하는 방법은 혼자만의 시간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최근 창업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 자리에서 확장시키는 것을 두고 고민에 빠져있을 때, 처음으로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남들이 보았을 때 좋아보이는 것, 남들이 보았을 때 안정되어 보이는 것, 남들이 보았을 때 그 무언가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에 귀 기울여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전같았으면 외부에 여러가지 조언을 구하거나, 그 핑계로 오랜만에 안부 연락을 하는 것을 즐겼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 자신과 독대하는 시간. 


그동안 참 애써왔구나. 남들이 말하는 애씀과 열심이 아닌 내가 나에게 말해주는 애씀과 수고. 그리고 내가 가장 마음이 편안한 순간이 언제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찾아갈 수 있었다. 다시 시간이 앞으로 당겨지더라도 내가 선택할 것에는 더욱 더 그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어쩌면 프리랜서였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꼭 엄마가 아니더라도, 나와의 독대 시간은 꼭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자존감은 결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내가 마음이 척박한 상태라면, '열심히 산다'라는 말도 비꼬는 듯이 받아들여질 수 있고, 내가 마음이 매끄러운 상태라면, 그 또한 격려로 들릴 수 있으니까.


치료사는 육아가 경력이 될 수 있다고들 많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겪을 수록 쉽지 않다. 나의 아이를 하원할 시간에 치료실은 가장 피크 시간이 시작되고,  기껏 머리를 써서 토요일 근무를 했을 때는 나의 아이는 아빠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대상 아이와 나의 아이의 연령이 비슷할 수록, 나의 아이와 함께해주지 못했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와서 머리가 아팠던 경험도 숱하게 지나가야 했다.


여기에서도, 내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세워진다면, 죄책감이 덜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더 건강한 자존감으로 아이와 만나고 아이에게 흘려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엄마이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언어발달 콘텐츠에는 더 공감의 힘이 실어질 수 있고, 글에도 힘이 실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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