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치료사 엄마에게도 낯설었던 시간.
현명하고 지혜로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 엄마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전공 공부를 하면서 더 단단하게 결심을 굳혀갔다. 생각해보면, 전공책보다 자원봉사 때 마주한 아이들, 영상으로 육아를 배우고자 보았던 방송의 영향이 컸다. 경험이 없으면 누구나 그렇듯 ‘나는 저런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꼭 지켜야겠다.’ 이렇게 결심하곤 했다. 이또한 돌이켜보니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결심이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입덧이었다. 평소에도 차멀미가 심한 편이었는데, 임신은 깨어있는 기간 내내 멀미를 하는 고통을 겪는 것 같았다. 남들은 중기에 들어서면서 입덧이 줄어든다고 하던데, 나의 입덧은 막달까지 지속되었다. 처음엔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향수 냄새도 괴로울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 사진만 보아도 헛구역질이 나왔다. sns 속 음식 사진을 다 지웠다. 치료실에 가져다 두었던 디퓨저는 상상만해도 화장실로 직행하게 되었다. 잠을 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임신 6개월 만에 다니던 직장을 퇴사했다. 직전 해, 그렇게나 애써서 논문을 쓰고 간신히 대학원 졸업장을 받았지만, 생각보다 탄탄대로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가임기 여성’, 그러니까 임신 가능성이 많은 여성은 정규직 취업 관문을 통과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집에서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출근길이었지만, 다니고 있던 기관은 근무 환경이 나쁘지 않았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신랑이 출근하고 난 후,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긴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임신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시간이었기에 더 외롭고 낯설었다.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논문 실험 대상자를 찾기 위해 가입했던 맘카페는 이제 주수가 늘어갈수록 찾는 나만의 초록창이 되어주었다. 임신했기 때문에 집에서 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쉴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는데 당시엔 그저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 마음이 그대로 행복이(아이 태명)에게 전해진다.” 친정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감사히 프리랜서로 주 2-3일 정도 출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막달이 되어갈수록 친정 근처가 그리웠다. 친정 근처가 부담스러워서 신랑과 도피하듯이 퇴사하고 온 지역에서 임신을 하고나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핑계가 길었지만 행복이에게 해주었던 것은 태교 인형 만들기, 캘리, 가을 바람을 쐬러 나왔던 산책 외엔 없었다. 성경을 읽어준다거나 책을 읽어주지 못했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 집도 친정 근처로 다시 이사했다. 나의 불안감만 다스리면 그래도 평탄한 육아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입덧으로부터 해방된 것만으로도 좋았던 출산 직후의 기억. 뱃속에 한 생명체가 자라나기 위해선 몸이 그것을 느끼기에 입덧을 하게 되는 거라고 들은 적이 있다. 출산 후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디퓨저는 이제 집에 들이지 않고 있지만, 그만큼 아이가 건강하기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