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을 하다 보면 부모의 결핍을 마주하는 순간이 많다. 가령, '나는 어릴 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예쁜 옷을 마음껏 사 입지 못한 게 평생 한이었어. 내 아이에게만큼은 적어도 옷은, 보기 좋은 것으로 사주고 싶어.' 이런 결핍이다. 교육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릴 때 아버지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지셔서, 잘 다니고 있던 피아노 학원을 끊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 아이에게만큼은 예체능은 꼭 시켜주고 싶어요.'
반면에 차고 넘쳤던 경험으로 인해 내 아이에게는 싫증을 방지하고 싶은 순간도 마주한다. 운동, 공부, 전집 읽기를 위한 자원이 과하면 소화불량이 되기 십상이다. 나에게는 가정 방문 학습지가 그랬다. 7살 후반기 무렵부터 시작한 학습지는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우리 집이 시골로 이사 오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되었지만 잊히지 않는 경험이었다.
요즘은 '사고력 수학', '문장제 문제', 그리고 '문해력'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어서 단순하게 반복 계산식만 푸는 학습지가 많지 않지만, 과거의 학습지는 그렇지 않았다. 집으로 오신 선생님께서 지정한 페이지 수만큼 풀지 않으면 어김없이 엄마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방문하시기 직전에 밀린 학습지를 푸는 모습. 20년이 훌쩍 지난 요즘도 집집마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나는 어린 시절에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지 못한 학습지를 아이에게 이른 나이에 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아이는 6살 하반기가 지나가면서 엄마와 아빠에게 간단히 편지를 쓰고, 덧셈과 뺄셈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집에서 놀이로 외운 곱하기 노래는 아빠와 게임을 할 때 2단, 3단을 적용하는 원리의 밑바탕이 되었다. 학습지 없이 해냈다!
아이에게 학습지를 시키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는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빨리 패턴을 터득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장 쓰기 숙제, 필사 숙제, 반복 계산식 문제 풀이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잔머리를 쓰게 되는데, 이는 나이가 어린 6살 7살 아이들에게도 다를 바 없다. 유아기는 주변의 모든 것을 즐겁게 배우고 호기심으로 배움의 첫 발을 들여야 하는데, 학습지는 이와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
예) '5+3=' 이러한 유형의 문제를 반복해서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온이가 사과를 다섯 개 가지고 있었는데, 슬이가 세 개를 더 주면 온이는 사과가 모두 몇 개가 되는 거지?' 이런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고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답을 알아가는 과정이 이후에 문장제 문제를 풀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세 번째 이유는 유아기의 정서를 해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최고야' 시기인 유아기는 문제를 틀리고 맞고 레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순간을 경험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영어 학원을 정리한 이유와도 맞닿아지는데, 6살 아이의 영어, 수학 레벨이 10년 후, 16살 때 영어와 수학 실력을 장담할 수 없다. '칭찬만 받다 보면 아이가 나중에 더 좌절하지 않나요?' 이러한 질문이 오갈 수 있지만, 6-7세에 자존감이 탄탄하게 자라난 아이는 이후에 좌절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탄력성도 튼튼하게 기를 수 있다.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결단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도 유치원 교실을 만들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유아기다. 학습지를 제작하시는 분들의 오랜 연구 경험과 노고를 무시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어린 시절, 억지로 풀었던 수학 교재의 잔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엄마의 선택으로도 후회는 없다. 아이가 세상을 배우는 데 있어서 외워진 패턴이 아닌 호기심으로 문을 열고, 배우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