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1 - 너는 늘 오지않는 누군가를 기다리지...
우리곁에 아기가 있다는 것은 마리에겐 큰 변화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그의 모습이 매우 달라졌는데 예전보다 훨씬 젊어졌고 단정해졌으며 심지어 아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는 온화해보이기까지 했다. 예전의 표독스러운 말투는 사라져 언뜻 보면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신을 버리고 아이를 찾아오는 복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결정에 마리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라주었기 때문일까. 생각치 않았던 전쟁을 함께 치른듯한 동지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을 진행함에 있어 합이 맞았다는 느낌일 뿐, 여전히 우리에겐 여전히 건너기 힘든 간극이 있었다.
아기를 바라보던 온화한 모습과는 별개로 내게는 사무적이고 무뚝뚝한 표정을 보였다. 그래도 그것 자체가 내겐 놀라운 변화였다. 그녀는 더이상 내게 욕을 퍼붓거나 조롱하듯이 힐난하지 않았으며 어떨땐 제법 예의를 갖추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까지했다.
아마도 그건 그녀가 아기와 함께 있는 동안에 생긴 변화였을테다.
그녀는 아기가 자고 있을때 곁에 앉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렇게 한참 넋이 나가 멍하니 있을 때는 나도 그곁에 조금 떨어져 앉아 편안하게 창밖을 보며 차 한잔을 마셔도 좋을 정도의 침묵이 허락되었다. 무언의 고요한 침묵은 그 자체만으로도 내겐 묘한 위안이 되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선 그녀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심심한척 던지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녀가 내게 조금씩 가지게 된 친밀함의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린 시절하면 새벽기차역이 생각나.
강원도 도계. 시냇물도 검게 흐르는 탄광촌. 사방이 검은 산, 검은 강으로 둘러싸인.
1시간만 지나도 마루에 연탄재가 소복히 쌓이는 검은 도시.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내 기억속의 도계는 검고 어두운 마을이다.
기억나? 아주 어릴 때...
큰 엄마에게 엎혀서 새벽 기차역에 서 있던 일...
회색과 보라색이 섞인 느낌의 차가운 공기...
기차를 기다리는 프랫폼엔 사람 몇명없어서 더 을씨년스러웠잖아.
멀리서 천천히 태양이 떠오르며 하늘과 세상이 변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어.
보라색, 분홍색, 붉은 색, 푸른 색으로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많아지는....
큰 엄마의 등에서 깬 듯 안깬 듯 등에 뺨을 대고 파고들며 졸려하던 모습...
난 그 시절 멀리서 떠오르던 해를 기억해.
그녀가 기억하는 장면은 내가 기억하는 장면과는 달랐지만 굳이 토를 달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마리는 그때의 주인공이 된 듯 몽환적인 말투로, 혼잣말처럼 내게 말을 건네었다.
기억나지. 작은 기차역. 플랫폼. 늘 큰엄마의 품에 안겨 있었지.
어린시절의 나는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잘 가는 낯가림이 없는 아이였다. 그래서 주로 큰엄마의 등에 업혀있었고, 병원에 오는 환자든 보호자든 간호사든, 아저씨든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잘노는 아기였다고 엄마가 말하곤 했다. 그래서... 덕분에 내겐 엄마가 없었다.
그녀가 몽환적인 새벽 기차역 하늘 빛에 대해 말하며 창밖 풍경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누군가에게 가서 놀아달라고 하면서 주변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린시절의 나를 기억했다. 때로는 병원을 청소하고, 때로는 서류를 정리하고 때로는 부엌에서 병원식구들 밥을 하고, 입원실을 치우고, 엑스레이를 찍고 암실에 들어가는...밤이되면 병원엔 아줌마들이 모이고 구석에 앉아 화투를 치는 일도 있었는데 어쨋든 아침부터 밤까지 엄마와 시선을 맞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살 아래로 태어난 남동생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동네 사람들은 엄마를 '병원사모님'이라 불렀고 아빠는 '저기!, 어이!'로 불렀으며 큰엄마와 언니들은 물론 엄마가 없을 때의 호칭이었으나 내 앞에서 꼭 '첩년'이라고 부르곤 했다.
내 입장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그저 '하녀' 내지는 '머슴'이었던 것같지만 그래도 엄마의 위치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엄마없인 병원 자체가 돌아가지 않기도 했겠지만... '아들을 낳아준 여자'라는 절대적인 자격. 아빠에게 남동생은 전쟁통에 월남해 큰 아들을 잃은 이후로 끝없이 방황하다 이 탄광촌에 정착해 병원을 열고 밥벌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한 유일한 의미였다.
한참을 각자의 다른 기억속을 헤매다 마리가 말했다.
기차는 왜 안왔을까...? 되게 많이 기다렸는데...
그때 그 기억에선 기차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 같아. 외롭고 쓸쓸하게...
그러게... 엄마는 왜 그렇게 바빴을까...
나도 꽤 엄마를 기다렸던것 같은데...
동상이몽...
다른 기억 속 같은 공기.
그 새벽 기차역의 냉랭하고 차가웠던 공기는 엄마를 쳐다보고 있는 나의 기억속에서도 익숙한 외로움이었다.
기차는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엄마는 나를 쳐다보아주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외로움 앞에 서서 차 한잔을 하는 침묵의 시간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