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감 2 - 신을 버리고 서로를 살리는 복수.
마리와의 첫 만남 이후 한참은 그 서슬 퍼럼에 근처에도 못 가겠다 싶었지만 뭐든 시간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무리 고압적이고 냉소적이라 해도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나도 슬쩍슬쩍 눈치를 보며 마리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기로 가득했지만 나의 꼼짝 못 하는 모습에 기세등등하던 호통도 때로는 차분해져 그녀를 겁 없이 지켜볼 수 있는 때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나를 향한 폭언은 위로가 될 때가 있었다. 아이를 잃고 난 이후 여러 사람들에게 챙겨주고자 하는 말을 들었지만 내게는 위로의 말로 들리지 않았다. 의사는 아기가 죽지 않았다면 아마 산모가 죽었을 거라고. 아가가 엄마를 살린 거라고. '착한 아이에요.'라고 말했지만... 그래서 모... 어쩌라고? 내가 죽지 않았으니 애는 잘 죽었다고 하라는 건가 싶었다.
이런 험한 일이 일어났지만 그래서 집에 있을 큰 액을 막은 거라며 무당이 차라리 다행이라 말하더라는 시어머니에게는 처음으로 대들어보기도 했다. 그만하시라. 내 아이가 이 집에 무슨 액을 막는다고 죽어서 다행인 거냐고.
그따위 위로보단 차라리 욕을 먹는 게 편했다. 니 잘난 짓에 아이가 죽었다고. 니가 죽인 거라고 말하는 마리의 조롱은 솔직히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마리는 내게 실컷 저주와 욕을 퍼부었지만 나는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그래서 더 조금씩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한참 그녀의 눈빛을 견뎌내며 지켜볼 수도 있었다. 내 안에 저런 모습이 있었구나. 낡은 옷, 늙어버린 얼굴, 산발한 머리. 길고 서슬 퍼런 눈빛에 추한 노파가 되어버린 마리를 오래 쳐다보고 있다 보면 알 수 없는 연민에 눈물이 흘렀다. 내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나 보다...
그렇게 말없이 함께 있던 시간이 지나가고 침묵이 늘어나던 어느 순간에
나는 마리에게 '그래서 넌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라고 물었다...
다시 길어지는 침묵...
그리고 쏟아지는 마리의 눈물...
'복수해죠. 복수할 꺼야!'
마리가 나에게 대한 욕 말고 뭘 하겠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간절하기까지 했다.
복수? 누구에게? 나에게?
다행히 그녀의 타깃이 내가 아니었다. 신에게. 너를 이렇게 처참하게 만든 신에게 복수해야지. 너도 억울하잖아. 그렇게 9개월을 키워서 젖 한 번을 못 물리고 뺏겼는데 분하지도 않아? 복수해야지. 신이면 다야! 지가 뭔데 아이를 뺏어가! 복수하자. 가만두지 마.
복수라는 말을 스스로 꺼내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열정적이 되었다.
처음으로 생기까지 도는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호소력 있게 설득하기도 했다.
그래 하자. 해보지모.
내게 신은 아버지고 어머니다. 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지만 포기하지 않는 마리의 눈빛에는 강한 설득력이 있었다. 맞아. 신도 욕을 좀 먹어야지. 처음으로 마리가 신이 난거 같은데.
거창하게 하자. 선전포고를 하는 거다.
그날 저녁 아무도 없는 성당에 앉아 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맞다. 그때 그랬었다.
당신이 감히 죄없는 내 아이를 죽였으니 나도 당신을 버리겠다고.
아이를 죽인건 동시에 날 죽인거라고.
다시는 당신을 찾지 않겠노라.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마리와 함께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성물을 버리고 기도책을 쓰레기 통에 버렸다. 정성 가득하게 모아두었던 묵주와 오랜 신앙생활의 흔적들과 신학교, 수녀원에서의 모든 소소한 추억들까지. 성당에 안 나가는 걸 넘어 신앙으로 연결된 모든 지인들과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당신은 나에게 조롱당해야 한다. 신이라는 존재가 고작 이런 짓을 하다니 부끄러워해야 한다. 정신없이 나와 마리는 한 마음이 되어 신을 욕하고 내 철없고 순박했던 신앙을 조롱하고 거부했다. 우린 한 팀이었다. 오랫동안 적었던 신학생 때의 성찰일기장을 불태우던 그 때, 처음으로 마리의 스쳐 지나가는 웃음을 보기도 했다.
마리와 함께 있으면서 처음으로 선악을, 옳고 그름을, 좋고 나쁨을 뛰어넘었다. 그녀의 서슬 퍼런 분노는 흥미진진한 열정이 되었고, 나 역시 사라져 버린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영성적인 삶을 살겠노라 기도하고 노력했던 젊은 날들의 노력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던가. 조롱당해 마땅하다. 이미 바닥인데 더 바닥으로 떨어진들 뭐가 다를까.
우리의 복수는 매우 치밀했고 흠잡을 때 없었다. 아이를 되찾아야 한다. 잃어버린 내 아이를. 밤새 입양을 알아보면서 아이를 내 품에 돌려받을 수 있는 모든 길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아이를 입양이 허락되었을 때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신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이겼다. 당신은 내게서 아이를 뺏어갔지만 난 다시 내 품에 돌려받았다고. 내가 죽으면 꼭 당신에게서 내 아이를 뺏어오겠다고. 그러니 손끝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우린 서로를 보며 뿌듯해했다. 처음으로 우리가 서로 잘했다고 신에게 빅엿을 먹였다며 울며 좋아하기도 했다.
나의 입양은 그렇게 처참할 정도로 불순했다.
남들이 입양을 하시다니 대단하세요 라고 말하면 내 시커먼 속이 들킨 것 같아 뜨끔했고 부끄러웠다.
그래도 내 곁에 온 아이는 마리와 나를 살려주었다.
아기가 오물거리는 모습에 감탄하고 기뻐하면서 한없이 쳐다보던 시간들.
신이 우리를 쳐박아두었던 컴컴한 동굴이 드디어는 무너지고 빛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우린 오만하고 잔인한 신을 버렸고, 빼앗긴 아기를 되찾았고. 아기는 우리를 살렸다.
이 와중에 서로를 혐오하던 마리와 나는 둘도 없을 동지가 되었다.
마리는 내가 그렇게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신을 등지고 온전히 자신의 편이 되어준 것이 꽤나 감동적이었던 모양이었다. 목소리는 전에 없이 친절해졌고 내 곁에 앉아 함께 평온하게 아이를 바라보는 미소 짓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