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감 1 : 거울 속에서 마리를 만나다
내가 마리를 처음 만난 건 15년 전 일이다.
나는 그날 그 강렬한 첫인상을 여전히 지금도 기억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별스러운 날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님 지금은 그 별스러운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어쨌든 인상이 강렬해서 그 주변부의 세세한 기억들은 날아가버린 건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그녀의 매서운 눈빛과 존재에서 뿜어져 나왔던 강렬한 차가움 만이 그녀의 첫인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장소는 특별해서 분명히 기억나는데... 화장실. 세수를 하고 있었고 그저 거울을 보고 있었을 테다.
어느 순간에 그녀는 내 곁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큰 키. 하얗고 긴, 그러나 색이 바랜 하얀 옷에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산발한 긴 머리, 그녀의 쏟아지는 눈빛은 온전히 내게 향해 있었고 나는 얼어버렸다. 귀신을 보았다고 말을 해야겠지만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느껴지기보단 내게 내려 꽂히는 힐난과 원망의 눈빛에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마치 난 너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긴 정적이 흘렀다. 한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십 년이 그냥 지나가는 느낌. 그녀는 정작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말이 비수로 내게 꽂혀 있었다.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심장에 전해지는 듯했다.
'네 탓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이 모든 일을 망쳤어!'
어느 순간에 그 마법이 풀렸을까. 정신을 차리고 나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며 하루를 이어갔지만 그녀와의 만남이 있은 이후로부터 매일매일 머릿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내렸다.
네가 잘난 척을 했어. 몰 그렇게 잘 안다고 방심하고 자만했지. 니가 죽였잖아. 어떻게 너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 거만하고 오만한 년. 넌 점점 더 뻔뻔해지고 있어. 양심도 없이.
와... 그녀의 차가운 독기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변명할 시간도 틈도 허락하지 않았고 마치 때를 만났다는 것처럼 내 생활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상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전에 없던 일들을 서슴없이 해치웠다.
마녀. 그녀는 정말 마녀 같았다. 나쁘다는 의미라기보다 그 쏟아지는 그 힘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녀가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마치 황녀처럼 권좌에 앉아 나를 끊임없이 단죄하고 있었고 여지없이 나는 방금 끌려 나와 꿇어앉힌 죄인이었다. 맞았다. 나는 도망 다니고 있는 죄인이다. 그녀는 마치 지명수배된 연쇄살인마를 잡은 양 늘 기세등등했다. 그리고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을 만큼 치밀했다. 혹여나 티브이를 보며 웃기라도 할까 봐. 마당의 꽃을 보며 여유를 부리기라도 할까 봐 늘 한편에 서서 나를 감시하고 몰아세웠다.
뭘 잘했다고 니가 행복하길 바래. 뭘 잘했다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마귀할멈 같으니라고. 그래 내가 죽였다. 임신중독증에 걸려 9개월에 2,7kg의 건강했던 아이를 사산한 나는 매일같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첫째를 무사히 출산했던 나는 자만했고 둘째는 조산소에서 자연분만을 해보겠다고 오만해했었다. 아이방을 꾸미고 출산 일기를 쓰고 며칠이면 태어날 아기를 위해 미술관을 여유 있게 다니면서 당뇨수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이가 위치를 바꾸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라고 괜찮다고 호언장담하는 조산소의 말을 믿어버렸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아이의 다리가 몸 밖으로 흘러나와 수술대에 끌려가듯 올라갔을 때의 의사들의 눈빛과 정확하게 닮았다. '저 멍청하고 바보 같은 여자가 아이를 죽였어.' 그랬다. 변명의 여지없이 나의 무지와 오만함이 내 아이의 생명을 앗아갔다. 나는 이 혹독한 칼바람 같은 비난을 맞아도 싸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위안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반드시 불행해져야 할 이유를 매번 노력 없이 찾아준 셈이다.
미안하게도 그녀의 바람처럼 잠도 못 자고 밥을 먹지도 못하고 살진 않았다. 큰아이를 방패로 내세워 나는 지금을 건강하게 살아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소위 집행유예라도 받은 죄인인양 좀 봐달라고 사정하면서 그녀와의 동거를 견디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잔인할 정도로 냉혹했다. 무서울 것도 없다는 듯 십자가를 비웃었고 신학을 전공했던 나를 조롱했다. 너의 신앙은 하잘 것이 없었다고 니가 배신을 당한 거라고. 그 수많은 기원과 정성은 위선이었다고 차라리 솔직하게 침을 뱉고 욕을 하라고.
내가 뭐라도 순한 말을 해보려고 하면 그녀는 눈을 흘기며 이죽거리고 킬킬거렸다. 어디서 감히 입을 놀리냐는 식으로.
얼어붙어 버린 나.
그때는 감히 이름을 지어준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내 안의 괴물.
정말 딱 미친년이었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내 아기를 찾고야 말겠다며 으르렁대는 맹수 같았다.
그렇게 마리와의 긴 인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