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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May 09. 2017

#43제주도는 느림이다

나미래의 여행 이야기_제주에서 아이와 걷고, 기다리며, 사람들을 만났다

  

  이번 제주도행에서는 버스를 타고, 느리게, 뚜벅뚜벅 걷기로 마음먹었다. 아들과 함께 둘이서 녹동항에서 제주항으로 1박 2일의 3등석 배표를 끊었다. 지난 2월 초봄, 제주도 가족여행에서는 남편의 차도 함께 동행을 해서인지 꽤 오래전부터 예약을 진행했었다. 그렇지만, 이번 제주도행은 90% 가까이 즉흥 여행으로 계획이 꾸려지면서 출발 전날이 되어서야 왕복 표를 구할 수 있었다.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연휴가 되면 더욱 바쁜 남편. 그는 고생하며 일할 것인데, 아들과 둘이만 표를 끊고 제주도를 날아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일찌감치 들었기에 선뜻 맑은 계획이 들어오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배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3박 4일과 2박 3일의 일정은 적어도 한 달 전, 두 달 전에 표를 구하기 위해 바쁘게 서둘렀단다.


매일 오전 9시에 출발하는 고흥(녹동)에서 제주로 가는 남해카페리호. 전날 예약을 하고 당일 표를 발행했다.


  친정이 숙소가 되어주니 떠날 수 있는 곳은 많았다. 보성 지역의 녹차 밭과 일림산 철쭉 산행, 그리고 완도항에서 떠날 수 있는 청산도 섬여행, 제주행은 친정이 숙소의 기점이 되어 어디를 가나 예약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환상의 드림 여행 코스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번 5월 징검다리 연휴에 세워진 간이 계획은 전라도 고흥반도 주변의 남도로 집중되었다. 보성 일림산 철쭉 산행을 다녀와 녹차 밭을 들려오리라는 계획은 함께 했던 일행 중에 한 분이 다리를 다치면서 계획이 무산됐다. 그렇지만, 여행 일정을 일찍 마무리하고 온 덕에 제주도 배표를 구할 수 있었고, 초저녁부터 체를 해 아파왔던 머리(나는 체를 하면 머리가 아픈 것이 제일 일 순위의 신호다.)가 새벽녘에 맑음으로 돌아와 제주도행 계획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체 내리기로 거금도 신금 동네에서, 그리고 이웃 동네까지 유명한 친정 엄마는 말 시작과 끝마다 “제주도는 다 갔네.”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아들은 울상이 되어갔다. 등을 밟아주고, 등을 두드리면서 ‘얘가 미쳤나 봐. 가지 말고 쉬어라.’라는 눈빛을 계속 보냈다. 체를 확실하게 내려준 엄마 덕에 새벽녘에 머리 아픔은 정상 괴도로 돌아왔고, 아들과 내가 제주도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작은 사건이 되어주었다.


시골집에서 여행가는 엄마와 오빠를 배웅하는 묶여있는 퍼그 산동.
저 멀리 제주항이 있는 제주시가 들어온다.


  5월의 제주도는 푸르렀다. 짙은 바다 색깔도 초록으로 뒤덮인 듯한 착시현상을 느끼게 했다. 아들과 나는 장소를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지난 2월, 거센 겨울바람을 등에 지고 고개를 숙이며 방문했던 해안사구 섭지코지는 우리의 첫 여행 장소가 되어주었다. 기막힌 해안 절경과 유채꽃이 피어오르던 그 광경은 이미 이른 봄물을 내보였던 2월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갔다. 대신 험한 바람이 그 자리에 오래 있게 만들지 않았다. 바람의 양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섭지코지를 5월에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염원이 이루어졌다.


각종 풀꽃들이 피어나는 계절 5월, 성산을 멀리 바라본다.


  작은 해안, 작은 땅으로 불리는 협지(狹地)가 제주도 방언의 입말에 따라 섭지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코지라는 이름은 '곶'을 나태내는 제주도 사투리라 하기도. 제주항에서 2시간 남짓 걸리는 곳으로 첫 행선지를 정한 것은 바람의 기억 외에 5월의 풀꽃과 해안의 풍경을 제대로 그리고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밝은 햇살에 푸른 바다 빛과 어우러진 진정한 봄물의 봄날은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살랑대는 잔잔한 바람에게도 쓰담쓰담으로 만져주고 싶었다.



  섭지코지의 주차장에서 5분여를 올라가면 넓고 평평한 코지(곶) 언덕에 옛날 봉화불을 지피던 돌로 만든 봉수대의 협자연대가 보존되어 있다. 아이는 지난번에 자세히 보지 못한 곳으로 다가가 꼼꼼히 글을 읽었다. ‘봉수대구나’라고 감탄하는 엄마에게 아들은 “엄마 협자연대는 봉수대와는 조금 다르대요. 여기 읽어보세요.”라며 나를 손과 입으로 이끌기 바빴다. 동북 방향으로 솟아있는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오름이라 불린다고 했지. 제주 사투리로 붉은 화산재를 ‘송이’라고 하는데 붉은 화산재로 이루어진 붉은오름을 사람들이 많이 오르고 있었다. 송이를 만지고, 발로 치고 다니며 놀고 있는 아이에게 어쩔 수 없이 주의를 주게 되었다. 바람에 날리는 먼지 가루를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붉은오름의 주변에는 성산일출봉뿐만 아니라 섭지코지 아름다운 풍광을 제대로 담고 있는 듯했다.


연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이다. 봉수대와는 기능면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연대는 주로 구릉이나 해변지역, 봉수대는 산 정상에 설치했다
붉은 오름에 하얀 등대와 왼쪽에 선녀바위가 보인다.


  아들과 나는 일정에 구애받지 않는 뚜벅이 느림 여행에 시간을 애걸하지 않았다. 늦어도 좋았고, 바쁘지 않았으면 했다. 더 놀 수 있었으면 했고, 더욱더 많은 풀꽃들을, 바다를 눈에 넣고 싶었다. 그런 소망이 담아졌는지 너른 잔디밭을 따라 끝까지 걸어 나가보니 화산석에 등을 기댄 야생화들이 고운 향을 내뿜으며 봄을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시원한 바람까지 그들에겐 큰 선물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풀꽃 야생화를 꺾어 손에 쥔 어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돌아오는 배안에서 안타까워 지어낸 시가 있다.

  

섭지코지의 5월_나미래

해풍에 젖은
풀꽃 야생화
뭇사람들 손짓에
고개를 흔든다.
 


  화산석과 만난 바다는 자연과 공생을 하고 있었다. 바다를 만나고 싶은 아들의 발걸음은 화산석 위로 조심스럽게 옮겨 놓고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없었던 거북손을 아들이 발견하고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흥이 가득했다. 둘은 화산석 바윗돌에 꼭꼭 숨어있는 거북손을 찾아내 된장국에 반드시 넣어보겠다며 돌에 붙은 거북손을 분리시켜보았다. 페트병 안에 바닷물을 담아왔음에도 살아남지 못한 거북손에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았다. 자연은 자연답게, 그곳은 그곳답게 남겨 주는 것. 풀꽃을 만진 다른 사람들을 탓할 것 하나도 없다.

 


  바다와 대화에 빠진 우리는 돌아갈 시간이 되자 섭지코지 주차장까지 시내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것을 기억해 내고 ‘택시냐, 걷기냐.로 잠시 고민을 하였다. 결국 버스를 타는 곳까지 해안선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징징거릴 것만 같았던 아들도 엄마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해안선 도로에 캠핑차를 멈추고 쉼을 그리던 어떤 부부에게 길을 물어보니 친절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아들과 걷고 있는 여행 수다를 옮겨놓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우리는 지역 주민들과 말을 섞을 기회가 흔치 않았다. 특히 렌터카나 자가용을 이용했으니 더더욱 그런 것 같다. 혼자일 때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번 여행은 지역 주민이나 여행자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조금은 다른 기억으로 더듬어질 것 같았다.


  산방산 근처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만났던 두 할머니는 유쾌했다. 버스 번호를 기억 못 하지만 늘 타는 그 버스의 행선지를 자세히 얘기하며 같이 가자고 독려해 주었던 할머니들. 두 분은 건강을 위해 제주 시내에서 산방산 탄산온천 찜질방으로 주기적으로 다니신다고 했다. 제주도의 사투리를 들으며 이렇게 신선한 여행도 있었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들은 “엄마, 그 할머니들 발음 중에 열한 시가 전부 열 헌시가 되었고요. 여덟 시가 여듭 시가 되었어요. 다른 말들이 많았어요.” 역시 아들은 청각적으로 탁월한 청취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뽐냈다. 아들의 말이 맞았다. 자연스러운 언어가 지역의 모습이고, 생활이며, 문화인 것이다. 그것들을 볼 수 있었던 여행. 짧았지만 참다운 느림의 여행이었다

 



  제주도에서 이동은 버스가 불편하긴 했다. 많이 기다려야 했기에, 많이 걸어야 했기에. 그렇지만, 그러면서, 그렇기에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자연의 빛을 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작게 보는 그림 하나하나가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도 '섭지코지'에 대한 시 한 편을 남겨주었다.


 섭지코지_최지산


섭지코지에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네


제주도 동쪽의

작은 땅은

웃음을 안기네


작은 땅 안에 든

큰 풍경


올레길 뒤에

숨겨진

큰 바위들이,

사람들이,

사진에 남는다


올레길 끝자락에

바다는

제주의 꽃.


https://brunch.co.kr/@mire0916/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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