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래의 수업이야기_외국인 제자들을 만나러 가는 시간
“오늘 많이 춥죠? 한국은 지금부터 겨울이에요. 여러분들 나라는 어때요?”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수업 시작 인사는 겨울 날씨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매주 일요일마다 재능기부 봉사로 한국어 토픽(시험) 초급반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5개월째가 되어 간다. 여러 국적을 가진 외국인 노동자들 또한 그 하루를 위해 배움의 교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국어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이곳저곳 문을 두드렸지만 ‘바늘구멍에 낙타 통과하기’와 비교할 정도로 그 자리를 찾기가 녹록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이름 난 이주민센터 같은 곳에 봉사활동 자리도 몇십 대 일을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시간당 월급을 받는 센터나 대학 내 한국어교육원 강사직이라면 그 경쟁률은 더욱 치열해진다. 면접도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는데, 너무 많은 한국어교원이 배출되고 있는 것도 문제의 한 중간에 서 있지 않나 싶다. 또 하나 자격증이 없었던 시기부터 봉사활동이나 한국어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선생님들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자격증을 따려 과정을 이수한다. 그리고 봉사활동 등으로 경력을 쌓고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는 순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글로벌 시대에 맞춰 더 많은 외국인이 들어오는 만큼 한국어교원 선생님도 또 늘어나겠지.
나는 내 직업의 전부였던 일본어 강의를 잠시 멈추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육아와 학습을 병행하며 전공을 바꿨다. 2년 동안 어린아이와 부대끼며 일을 내려놓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육아가 즐겁기도 했다. 아니다. 육체와 정신이 간혹 유체이탈을 하기에 나와 아이와 가족을 괴롭힐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육아가 중요하다 생각했다. 너무 일이 하고 싶을 때는 짧게 나오는 저녁 시간의 일본어 기업 출강을 기웃거리며 경력 단절이 되지 않도록 조금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생각은 출장이 많은 남편이 밖에서 신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집안을 더 꽉 지키고 있으라 했다. 이른 아침과 저녁, 아이의 육아 시간과 겹치지 않으면서, 또한 나이가 들어서도 외국에 나가 사람들을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 끝은 '한국어'였다.
동탄으로 이사를 오니 나의 경력단절이 안타까운 지인들이 이곳저곳의 강사를 모집하는 정보를 주기도 했다. 몇십 대 일의 면접을 뚫어야 하는 그 열정에 비해 강의 금액이 너무 적은 것. 속물 같아 보였지만 한창 때에 부렸던 에너지를 이제는 다할 용기가 없어져 가고 있었다. 배가 불렀지 싶다. 경력을 위해 집에서 멀리 출근하기 싫은 나태함이 결국 발동을 했다. 글을 매일 쓰고 싶다고, 얽매이기 싫다고, 자유롭고 싶다고 에둘러 표현하며 거절한 게 고작 ‘아직 육아에 전념하고 싶다.’였다. 그렇지만 봉사활동은 일상생활의 활력소가 되리라는 생각에 돈을 받지 않는 하루의 두 시간을 선택했다. 내가 하고 싶은 틀 내에서 강의를 하고 경력을 쌓으려면, 돈을 받지 않는 곳이 나와 맞아 보였다. 그곳이 바로 오산에 있는 행복한학교였다.
매주 새로운 이들이 찾아드는 이곳은 초급 토픽(시험)을 가르친다는 내용이 무색할 만큼 레벨이 중구난방이었다.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을 이제 배워야 할 것 같은 실력의 학생들이 더 많아 보였다. 초급 토픽 반이 따로 있었지만, 시험 반에 들어간 초급 자보다 입문 정도의 수준의 학생들이 더 많이 센터를 찾고 있는 기묘한 현상을 목격했다. 봉사를 시작한 나에게 처음에는 관리 책임이라는 직책이 부여됐다. 센터에서는 한국인 고등학생들이 원어민이라는 이유로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은 센터에서 봉사활동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너무나도 다양한 실력을 가진 학생들의 레벨을 구분하고, 센터에 찾아오는 학생들을 그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1:1이나 1:2로 연결해 주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봉사를 하는 고등학생 선생님들도 일주일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지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시험 때가 되면 넘쳐나던 봉사자 고등학생들도 발걸음이 뜸해지는 것은 더욱 문제였다.
초급 한국어 토픽을 맞고 있던 선생님이 그만두면서 나는 그 강의를 이어받았다. 밖에서 한국인 고등학생들과 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한 교실로 모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흩어졌던 레벨의 외국인 학생들을 모아 정식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한국어 한 문장 한 문장도 구사하기도 어설픈 학생들에게 시험 강의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들의 조력자 역할을 맡던 많은 고등학생들은 나의 강의실로 들어와 외국인들 옆에 앉아 함께 수업을 들었다. 간혹 수업 내용을 이해 못하는 학생들을 돕기도 했다. 한국인 학생들이 외국인보다 더 많이 앉아 있었던 날도 있었다. 날이 더해질수록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보며 앉아 있다 시간을 채우고 나가곤 했다. 꼭 내가 한국어교원을 취득하기 위해 연수를 받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내가 박사과정을 진작 받았다면 너희를 가르칠 수도 있는 나이다.’ 라며 웃음을 숨겼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이렇게 나는 시어머니들이 잔뜩 앉아 있는 오픈 강의를 충실히 해 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조용히 봉사자 학생들은 나의 강의실에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오픈 강의는 막을 내렸다.
매주 강의실을 찾는 사람은 10명 남짓이다. 새로운 얼굴들이 간혹 문을 두드릴 때가 많다. 그리고 그다음 주엔 그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너무 쉽거나, 내 말을 못 알아먹거나, 어려워서 다시 찾지 않는 경우 말이다. 그런 사람은 입소문을 따라 공짜 수업에 참여해 보러 온 이가 많다. 강의의 분위기를 탐색하러 온 것이겠지. 친구 따라 수업을 들으러 왔다 매주 나와 눈을 마주치는 사이가 된 외국인은 더 많다. 베트남, 인도, 우즈베키스탄, 필리핀에서 온 이들은 노동 현장에서 주중을 보내고 주말엔 나의 학생이 된다.
여전히 일요일 오후가 되면 아들의 손을 잡고 이들이 기다리는 강의실로 향한다. 힘이 약한 외국인도 엄마의 사랑스러운 제자들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아들에게 계속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