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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Nov 06. 2018

순천만 갈대밭엔 바람과 안개가 숨어 있다

나미래 여행 에세이_가을바람을 놓치면 안 되는 곳, 순천만습지 갈대밭


순천만습지 갈대밭에서는 가을의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미래  


<순천만 갈대밭, 그곳엔 바람과 안개가 숨어 있다>



   순천만의 갈대밭이 그리웠다. ‘가을과 겨울 사이’라는 흔한 계절의 대명사는 이곳을 위해서 꼭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유연한 초록을 태우고 너울대는 황금 갈대의 그림자는 여전히 고즈넉한 이곳 습지의 풍경화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흔들리는 여자의 마음을 비유한 갈대’만을 그리워했던 건 아다. 순천만 습지의 갯바람. 너른 갈대밭을 휘감고 자리 잡아 들어앉은 그 된바람을 먼저 찾아왔는지 모른다. 그 맑지만 거센 바람, 찬바람, 겨울바람을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안온함이 내 몸으로 다가오는 걸 느끼고 말았다.



너른 순천만 갈대밭에서는 가을과 겨울 사이의 된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몸을 내맡긴 가을의 갈대가 햇볕과 바람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나미래



  우리 가족이 방문했던 주말은 순천만습지 갈대축제(2018.11.2.~2018.11.4.)가 있었던 그 일주일 전 일요일 오후였다. 친정에서는 호박고구마가 무르익고 있었고, 그 고구마를 수확해 뒷정리를 하고 남은 시간 순천을 향해 달렸다. 친정은 순천과 지근거리에 있어 얼마 다행인지 모른다. 고향을 오가는 길에 잠깐 여유를 내고 싶을 때 찾아가는 그런 곳이 되어 주기에 내겐 더 반가운 지역이 아닐 수 없다.


  순천만 갈대밭은 늦가을의 정서를 오롯이 다 지니고 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넉넉한 평야는 눈에게는 화려함을 내려놓게 하고 자연의 색을 덧칠한 너른 습지 갈대밭을 말없이 바라 보라 한다. 바람이 내게 말을 건다. 몸을 내어놓고 가을을 타보자고.






  근래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복잡한 시간이 켜켜이 쌓아졌었다. 아들의 담임 선생님과 야울야울 태워 올렸던 위대한 일상의 감정 불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던 시기였다. 이곳의 바람은 이미 나의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고, 나의 뼛속 DNA까지도 시원하게 다른 공기로 바꿔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구름옷을 걸쳐 입은 갈대들의 소리가 정겹다. 가을 타는 침묵에 반(反)할지라도 속내를 새로 쓰고 지우고 어울려가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한다.  




  

  순천만의 또 다른 명물. 나는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어스름에 소복이 내려앉는 이 지역의 안개가 밝은 오후의 상상 속에서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배경 무대가 되었던 순천만 일대의 명물을 ‘안개’로 표현했던 문장을 한 번 보시라.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김승옥 [무진기행] 일부분.>




순천만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갈대밭 풍경.



  3년 전 가을, 시월의 바람이 잠시 콧등을 스치고 기억을 데려온다. 고교 은사를 만나기 위해 친구와 함께 떠나왔던 순천만 일대. 송병천 선생님을 순천만 갈대밭에서 만났다. 기나긴 산책을 했고 순천만 습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용산전망대에 오르기까지 했다. 또한, 김승옥 작가가 70여 일 정도 기거하는 문학관으로도 발길을 옮겨보았다. 시월의 갈대는 아직 푸름을 간직한 건장한 모습이었다. 물론 선생님도 시월의 갈대를 닮아있었다.

  고교 시절과 어느 시점의 과거, 현재, 앞으로의 이야기를 맛있게 버무려 먹게 해 준 선생님은 내겐 아련함과 맑음 사이를 풀어내안개와도 같은 분이다. 헤어질 때 선생님은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책을 친구와 내게 작가 친필 사인을 얹게하여 건네주었다. 뜻깊은 작가와의 만남 뒤, 정작 갈대를 볼 때마다, 순천만을 찾을 때마다, 그 작가보다 안개의 지역에 사시는 우리 선생님이 생각난다.    


  위대한 일상이 별 거 있겠는가.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한 생각들과 사물, 사람들과의 만남들이 특별한 날을 창조한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 애면글면 바람이 지나갈 넉넉한 자리 하나 만들어놓고 노랗게 나이 들어가는 갈대들이 나를 닮은 것 같다. 갈대밭엔 바람도 안개도 모두 숨어 있다. 이 가을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갈대를 닮았다. 그렇다.


 

3년 전, 2015년 가을, 김승옥 문학관과 용산전망대를 함께 올랐던 송병천 선생님과 어린 제자들이 사진으로 남았다.
아들은 여행 중엔 한 손에 든 큐브를 자주 만지작 거린다. 갈대밭 풍경 반 취미 반이 모였다


  아들도 갈대를 닮았다. 여러 사물들과 사람들이 흔들리게 해도  혼자서 정신력 강하게 이겨낸 게 많다. 요즘을 칭찬하며! 그렇지만 아직 응석부려도 된단다!



나미래의 詩詩한 시와 글 이야기

https://brunch.co.kr/@mire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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