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래의 한국문화 이야기_결혼 후, 집안 시댁행사로 바라본 제사 행위
“자기야, 이맘때, 할아버님 제사가 있는 것 같은데, 달력에는 체크가 안 되어 있네.”
“그래? 맞다. 그렇지! 할아버지 제사지 아마. 형한테 전화 한 번 넣어봐야겠네.”
올해 달력에 시댁의 제사 표시를 해 두지 않은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남편에게 시댁 할아버지 기일 날짜를 물었다. 남편은 아주버님에게 전화를 걸더니 서로 음력 날짜에 확신이 서지 않는 듯, 설왕설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작은 시누인 형님에게 전화를 걸며 제대로 된 날짜를 확인하고 만다. 남편은 다행히‘일 년 행사 좀 미리 적어두고 알아서 챙겨주면 안 돼?’라는 말로 아내를 속상하게 하지 않는다.
작년부터 시어머님이 모시던 제사를 집안의 장손인 아주버님이 맡게 되었다. 시댁 형제간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있는 제사를 좋은 날로 합하자는 의견이 계속 나오던 터였다. 때문에 어쩌면 나는 한 날짜로 묶어질지 모른다는 희망을 연초에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어떠한 메모도 없었던 것을 보니 말이다.
결혼 30년 차에 집안의‘제(祭)’를 안고 옮겨간 시댁 큰 형님은 향냄새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런 형님이 작년 음력 11월이 되어 본인의 집에서 첫제사를 지냈다. 시어머니가 계신 시댁에선 제사상에 향과 초만 피워낼라 치면‘창문을 열어라. 향은 안 피우면 안 되나?’라며 말이 없는 분이 유독 말이 많아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주버님은 아내인 형님을 째려보는 가자미눈이 되는데, 옆에서 함께 일을 하는 나도 좌불안석이 된다.
형님 댁에서의 첫제사여서 그런지 그날은 향냄새에 대한 많은 태클은 없었다. 추석과 설, 그리고 제사 두 번, 시어머니 생신으로 시댁 행을 하는 동서지간인 우리는 유독 그때만 연락한다. 전화 통화도 아닌 짧은 문자로 ‘동서 어디야?’가 형님이 나에게 보내는 유일한 문자 연락이다. 우리의 관계는 참 평행선을 닮았다 싶다. 그렇지만, 형님 댁으로 제사 준비행사를 옮겨온 덕분에 대화와 웃음의 간극이 시어머니가 계신 시댁보단 길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제사의 행위에는‘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는 집안 남자들의 바람이 깊게 뿌리 박혀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손님맞이 준비에서 본격적인 음식 준비, 그리고 마무리까지 여자들의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무엇보다 이렇게 반복되는 집안 행사에 잦은 불만과 감정싸움이 편하게 풀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라!’라는 말은 정말 말이 쉬운 거다. 적어도 10년 차 주부인 나의 경험을 빌리자면, 시어머니와의 삐걱거리는 관계 때문에 시댁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 자체가 편치 않았다. 시어머님 옆에 가는 시댁 행이 싫었다고 지금은 과감히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제사를 다니며 많은 생각을 한다. 조상을 잘 모셔야 하는 특별한 의무보다, 그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의 마음을 편안하게 음식에 담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예의 마음을 버리지 않되 제사문화도 조금 간소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매년 남편에게도 전달하려 노력한다. 제사나 명절이 있는 시댁에서, 아니 이제 형님 댁에서, 부엌 가까이 서는 것을 쑥스러워하지 않도록, 전을 부치는 아내를 위해 가벼운 도움을 주는 움직임도, 아내들을 배려하는 남자들의 과묵한 향내가 그려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함께 만들어 가는 제사문화를 기대하고 싶다.
몇 해 전, 시어머니는 집안의 두 며느리에게는 월차나 반차를 내며 제사에 참석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비췄었다. 조금 더 일찍 가느냐. 늦게 가느냐로 시어머니와 아들들, 며느리들 사이에서 서로 눈치를 보며 아들에게만 전달하는 집안 문화가 분명 존재했다. 그런 마음의 비침은 오롯이 시어머니의 영역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바쁘게 일하는 몸이라 며느리들이 당연히 먼저와 준비를 해야 하는 것에 익숙해진 오래된 문화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남편은 국내 출장 중일 때는 최대한 제사를 맞추려 노력하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다. 그러나 조상의 덕을 보고 싶어 제사를 챙기는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오래된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예를 다하는 행위와 아내가 싫어하는 시댁 행과 시어머니와의 만남에서 적절한 연결의 매개체 역할만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혹여 남편이 해외출장에 나가 있기라도 할 때면 며느리 혼자서라도 손자를 데리고 꼭 참석해줬으면 하는 시어머니의 바람을 모르지는 않는다. 또한 남편의 입장도 분명히 그럴 거라는 것도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짐짓 혼자서 지나치고 싶다.
우리 집에서, 남편과 나는 봄이 오는 길목쯤에 일찍이 유명을 달리하신 남편 바로 위 형님의 제를 모시고 있다. 벌써 10년째가 되었다. 결혼하고 바로 남편은 제주(祭主)가 되었다. 출장이 많은 남편 대신 제사에 관련된 일련의 준비는 전부 내가 맡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남편은 제사 직전부터 나의 눈치를 보느라 바쁘다. 제사를 맡게 되고 3~4년 정도는 온갖 스트레스를 다 받았던 것 같다. 익숙지 않은 음식문화와 시댁 친지들의 모임이 낯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제는 커가는 아들과 남편이 제사를 준비하는 아내와 엄마를 돕는다. 그 모습에서 내게 스트레스가 내려앉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옛 어머님들의 지내온 제사문화가 다 맞는 것이다. 다 맞지 않는 것이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많은 이들이 아직도 계승하고 있는 우리의 현재 제사문화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에 맞게 제를 올리는 사고방식도 변화를 꾀할 필요성이 보인다. 서로 함께, 그 집안 분위기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차림의 기본은 다하되 맛있는 저녁 한 끼 대접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면, 나이 먹어가는 세상과 함께 엮어가는 인연이 아름다움이라는 언어 위에서 그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