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 열차에서는 여러 문화가 오간다. 그 문화 속에 그들의 익숙한 사생활이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곳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열차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자신들의 본성을 감추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문화를, 언어를, 이해하고 통하는 선이면 열차에서의 복잡한 행위에 시시비비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규격화에 경직되는 곳이지만 행동은 생각보다 자유롭다.
열차에서 삼⁰일째 날이 밝았다. 오전 8시경, 짐마(Zima, Russian) 역에 도착한 횡단 열차는 두 번째 중국인 부부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후 8시간 후 또 다른 부부가 앞자리를 채우기 전까지 너른 Table을 최후의 만찬처럼 아들과 나는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도 앞자리에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2019년 6월 12일(수) 오후, 크라스노야르스크 크레이 역을 지나고 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크레이(Ilansky, 러시아) 역에서 횡단 열차는 20분 정도 정차를 했다. 우리 앞자리에 여자 한 명이 먼저 걸어 들어왔다. 뒤를 따라 성인 남자 한 명과 어린 남자아이가 함께 인 것으로 보아 3인 가족인 듯했다. 아내와 남편인 그들은 비슷한 체격이었다.
부부 둘 다 키가 컸으며 근육과 살을 적당히 비슷하게 나눠가진 부부였다. 여자는 키만큼이나 얼굴과 눈도 컸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여자인 듯했다. 손톱엔 다양한 색의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고, 초미니 원피스가 그랬다. 가려지지 않은 신체 부위가 더 많아서 눈을 피할 길을 찾다 책을 보거나 일부러 얼굴을 돌려버릴 때가 더 많았다.
시간이 좀 지나자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은 그들 세 명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을 자야할 시간이 되면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분과 손자가 함께 우리 건너편 침대를 쓰는 것이었다. 내가 만난 러시아 사람들은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그 할머니 역시 손자를 야단칠 때도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를 내곤 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얼굴이 익숙해졌으리라. 그들의 아들인 듯한 아이는 계속 큐브를 하는 건너편 형을 쳐다보며 눈길을 준다.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테이블 위에 큐브를 올리고 만지도록 해주자 그제야 긴장의 눈빛을 풀어놓는다.
아들을 내팽개치고 열차 생활을 즐기는 그들 부부 중 남편은 술 한 잔이 들어간 듯했다. 자신들의 두 무게가 3등석 의자 침대에 올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든 것 같았다. 아니다, 어쩌면 횡단 열차의 침대의 무게 습성에 이미 여러 번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낄낄거리며 침대 시트를 들고 커튼을 치는 이 두 부부의 모습에 경악스러움의 눈빛을 보내려던 참이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행동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지만, 열차 일상의 화면은 선명했지만 배려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초등생 아들을 데리고 열차 통로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에겐 ‘저들이 행동으로 내가 이 자리를 이탈합니다!’라는 비난 투의 입 꼬리와 ‘18+제기랄’이라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말이다. 그들 부부를 앞에 두고 입이 부딪히는 소리를, 그 좁은 의자 침대에서 살이 터질 듯한 공간 배열을 하며 누워 있는 그들의 모습을 아들에게는 리얼하게 보이기 싫었다. 이런 식의 성교육은 우리 각자 민망한 것이었으니까. 2층에서 영화를 보던 아들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엄마에게 끌려내려 왔다.
담당 승무원은 외국인 승객(내가)이 시트를 치고 누워있는 그들을 향해 영어로 불만을 토로하는 의미를 늦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이제는 쿨쿨 자니 자리로 돌아가도 돼요.”라는 말을 건넨다. 열차의 이웃들은 ‘괜찮냐?’며 그들의 말로 위로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열차에서 내릴 때까지 사람들은 그렇게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문화로 치부하기엔 나는 이런 식의 문화는 사양하고 싶다. 주변에 예의와 배려가 없는. 우리나라였다면, 어른들 곰방대 하나쯤은 날렸을 법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