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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사

by 미래지기


뇌에 칩을 이식하는 일이 일상이 된, 이른바 전뇌(電腦) 사회를 배경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가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형사'는 사람의 머릿속을 해킹하여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는 해커다. 드라마 버전 다섯번째 시즌에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소프트웨어로 등장한다. 이름만으로도 괴기스러운 이 해커(또는 소프트웨어)는 "인형을 조종하여 인형극을 연출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인형사(人形師)'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참고로, 공각기동대는 2025년까지 시즌 7로 공식적인 막을 내렸다. 물론 스핀오프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형사는 오늘도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도통 한 자리에 10분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어디론가 계속 바쁘게 이동한다. 광대가 나온 얼굴에 깡마른 체격으로 봐선 원래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 중요한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 위해 참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침도 거른채 세 시간을 차로 달려와 쉬지도 못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어렵사리 파악한 참고인 한XX씨의 소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계속 중얼거리며 앞만 보고 걷는다.



한XX씨. 172cm 정도의 키에 뒷목까지 닫는 길고 곱슬한 머리, 군청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오겠다고 한 그는 자기가 사투리를 좀 쓴다고 말했다. 안드로이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너무 많은 것은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인형사는 위장 신분으로 그를 만난다.



맞벌이 부부를 위해 아이를 봐주는 로봇이 시장에 나온지는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이를 둔 거의 모든 부부가 하나 이상은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시장이 급속도로 커져서 속칭 '대리모 신드롬'이라는 사회현상까지 일어났다. 출산을 대신 해 주는게 아니다. 어머니의 역할 대신 해 주는 일종의 유모 로봇이다. 유모 로봇을 제작하는 회사 중에서도 특별히 '인형'사(社)가 유명한데, 하필이면 이 회사가 만든 BAYBE2030-K9 모델이 연쇄적으로 유괴, 아니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원래 사이버 유괴/실종 전담인 최형사와 조형사가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제 밤 급하게 강력계로 넘어온 바람에 부서에서는 일대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오늘 아침 서장으로부터 단독 수사 명령을 받은 인형사는 자신이 이 사건을 맡게 된 것은 '공각기동대의 마지막 세대'라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약간 우스운 추측도 해보지만, 그가 부서 내에서 유일하게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 자신 역시 유모 로봇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진짜 이유를 깨달은 것은 한XX씨가 산다는 곳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다.



약속한 장소에서 20분이 지나도 한XX씨와 비슷한 사람은 지나가지 않았다.

장소를 잘못 안 것일까? 초조해하며 연신 시계를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10분을 더 보낸다. 실망한 얼굴로 장갑을 벗고 전화를 걸기 위해 손가락을 오므리다가, 뒤에서 속삭이듯이 말하는 묵직한 소리에 소스라친다.


"인형삽니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군청색 바바리 코드, 가면을 쓰고 나타난 사람!


가면에는 손가락이 그려져 있다.

아니, 손가락이 아니다!



'이럴 수가... 웃는 남자?'


순간, 인형사의 머리 속에는 자기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형사인 것을 알았는지 의문이 스쳐갔다. 위장이 들통난 것인가? 놀란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가늘게 되묻는다.


"한... XX 씨?"

그는 듣지 못했는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작은 명함을 내민다. 명함에 얼굴을 가까이 대는 인형사, 곧 눈이 휘둥그레지며 뒷걸음질 친다.


"신상 입하! 싸게 드립니다. 인형 사세요!"



▨ 미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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