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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레티아 Aug 05. 2016

살아가는 이유

자살과 타살 사이

최근에 초등학생이 자살을 했다고 기사가 떴다.


<경찰 "학원 화장실서 숨진 초등생 자살 결론">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newsview?newsid=20160804174511361


참... 안타까운 사건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견딜 수 없었으면.


그런데, 세상에 진짜 자살이 존재할까?


자살,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음". 스스로, "남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결심하여". 즉, 자살이라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남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결심하여 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결심의 과정이 

사회적 압박이나 남에 의해 유발된 것이라면 

그것을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전적 의미로 보면 문제가 없다. 자살이 무엇인지 확실히 구별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끝내기는 너무 마음이 아프다. 스스로, 자꾸 이 말이 마음에 걸린다. 잔소리를 듣고 나서 하는 공부는 억지로, 수동적으로 하는 것이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이 괴롭혀서 자살을 결심하는 것은 '스스로'라고 보기는 어렵다.


잠깐 자살과 반대 의미를 가진 용어를 보자. 타살, "남에게 죽임을 당함". 직접적으로 죽인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자살한 사람 주변의 사람들은, 아니, 우리는, 타살을 행한 것이다.


그래서 난 이것을 자살과 타살 사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살로 끝내기는 마음이 아프다. 누군가의 책임이 있고, 누군가는 처벌을 받아야 정의롭다. 그 누군가는 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작은 집단이 될 수 있고, 사회 전체가 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순수한 자살은 존재하기 힘들다. 만약 존재한다면...  소설 속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한 것 아닌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그렇게 극한 상황까지 내몰려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상황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접 그 상황까지 가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선택지가 여러 가지인지, 한 가지인지는.


친구들과 밤에 걸어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토론을 하는데,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반대 측에서 이야기하면 그다음에 토론이 진행될 것 같지 않아서 생명이 소중하다를 합의점에 넣어놓았다고. 물론 학교에서 토론하는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대화를 하면서 인간은 왜 살까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나온 이상한 결론이,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과거부터 계속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살아남은 사람은 살고 싶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이는 후대에 전달되는 유전자나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전달되는 학습의 내용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월이 진행될수록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 다수가 되는 것 아닐까.  


물론 나는 왜 사는가 보다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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