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의 프레이밍 20
144경기나 되는 패넌트레이스 막판에는 대부분의 팀이 약간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 경기들을 펼치기 마련이다. 엔트리에서 주전들이 빠져나가고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신인이나 유망주들로 채워진다. 남은 주전들은 오버플레이를 하다가 다쳐서 다음 시즌에 영향을 주기 보다는 안전한 플레이를 지향하게된다. 당연히 팬들의 관심도 멀어진다. 이미 순위가 결정된 팀의 팬들은 시선을 포스트시즌이나 내년 시즌에 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2024시즌은 달랐다. KIA타이거즈의 김도영은 막판까지 40-40에, 롯데자이언츠의 빅터 레이예스는 최다안타 신기록에 도전했다. 한화이글스는 '대전한화생명이글스파크'와의 작별이라는 순간을 앞두고 있었기에 매 홈 경기가 역사적 기록의 현장이었다. 여기에 KT위즈와 SSG랜더스는 포스트시즌 마지막 티켓 한 장을 두고 치열한 순위다툼을 벌였다. 설마설마했는데 두 팀은 끝내 동률이 되어 타이브레이크에 돌입하기에 이른다.
KBO리그에서는 보통 포스트시즌 진출 여부로 한 해의 성패를 가름한다. 그런 의미에서 2024시즌 SSG랜더스는 '한 끗'도 아닌, '반 끗', '반의 반 끗' 차이로 아쉽게 분루를 삼켜야 했다. 경기가 펼쳐지면 둘 중 한 팀은 질 수 밖에 없지만, 진 팀이 SSG랜더스라는 건 왠지 낯설었다. 내가 아는 SK와이번스-SSG랜더스는 그런 끈적한 상황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잘 이기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2024시즌 10개구단 중 가장 먼저 외국인 선수인 로버트 더거를 퇴출시켰던 SSG랜더스이지만 이후 합류한 앤더슨이 나쁘지 않은 투구를 보여주며 무난하게 재계약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 대신 투구 내용은 나쁘지 않았으나 연차에 따른 내구성 이슈로 엘리아스와는 결별하고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일명 '짭찬호'라고 불리는 미치 화이트와 계약을 했다.
어머니가 한국계 미국인인 미치 화이트는 생긴 건 박찬호와 닮았지만 강속구를 앞세우는 투구 스타일인 같은 팀 외국인 동료인 앤더슨과 유사하다. 앤더슨이 빠르게 KBO리그에 연착륙 한 만큼 미치 화이트도 리그에 적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내구성이다. 아프지만 않는다면 잘 할텐데, 아플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2025시즌 FA시장 최대어를 두고 많은 이들이 선발투수자원인 최원태와 엄상백, 혹은 불펜투수인 김원중을 꼽기도 했으나 이는 모두 한 가지 공통된 전제를 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건 "최정은 FA시장에 나오지 않는다." 였다. 하지만 비FA다년계약으로 입도선매할 것 같았던 최정의 계약 소식이 도통 들려오지 않자, 2024시즌 막판 SSG랜더스를 제외한 9개 구단 팬들의 머릿속에는 '우리 팀에 최정이 온다면?'이라는 상상회로가 갑자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건 이미 주전 3루수가 있는 팀이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응원하는 KIA타이거즈만 해도 그렇다. 3루에는 김도영이 있지만 최정이 온다면 1루에 최정을 쓸 수도 있고, 최정이 3루에 서고 싶다 그러면 김도영을 유격수로 돌리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다른 선수도 아닌 최정이다. KBO역대 최고의 3루수다. 그런 선수는 빈자리가 있어서 잡는 게 아니다. 빈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잡아야 한다.
하지만 SSG랜더스가 최정을 놓친다는 건 새로 지을 청라돔 인조잔디밭에다 소 키우겠다는 소리랑 똑같았다. SSG랜더스는 4년 총액 110억 전액보장의 조건으로 최정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최정은 FA로만 302억을 벌어들여, 최초로 300억클럽을 연 사나이가 되었다. 최정의 계약조건이 나오자 일각에서는 최정 연차에 너무 비싼 계약 아니냐며, 그간 공헌도를 생각해서 얹어준 게 아니냐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최정이라면 저 정도 활약은 충분히 해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최정이다. 난 그가 적어도 자신의 몸값만큼 활약해줄 것이라는 데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쿠폰 한 장 정도는 걸 수 있다.
노경은 계약(2+1년, 총액 25억원)도 마찬가지다. 그도 자기 관리 측면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다. 경기를 마치고도 보강훈련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보면 운동선수를 넘어 한 개인으로서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만큼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불펜투수라는 보직과 쌓여있는 연차가 있지만 노경은의 급격한 기량저하는 생각하기 어렵다. SSG랜더스는 이렇게 투타의 핵심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2024년 10월 31일, 스토브리그를 뜨겁게 달군 트레이드 소식이 발표되었다. 타이브레이크에서 만났던 두 팀 간의 트레이드라 더 크게 관심을 끌었다. SSG랜더스는 좌완 선발인 오원석을 내주는 대신KT위즈의 우완 불펜투수인 김민을 영입했다. 1대 1 맞트레이드라는 건 성패가 더 분명하게 보이기 마련이어서 향후 결과가 주목된다.
오원석과 김민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잠재력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보는 이마다 평가가 갈릴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가장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김민의 투구 이닝이다. 2024시즌 김민은 71경기에 등판해서 77.1이닝을 소화했다. KBO리그 전체 불펜투수 소화 이닝 중 4위다. (1위가 노경은, 2위가 KT위즈의 김민수, 3위가 KT위즈의 박영현이다.) KT위즈 리뷰를 작성하며 한 이야기인데 KT위즈가 초반 부진을 겪다가 후반기에 되살아나는 건 불펜진 혹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트레이드는 KT위즈의 이강철 감독이 만든 폭탄 하나를 SSG랜더스가 껴안은 모양처럼 느껴진다.
김민의 투구 이닝을 보면 2025시즌 초반부터 관리가 꽤나 필요한 상황으로 보이는데, 막상 SSG랜더스의 이숭용 감독도 불펜 관리에 있어서는 악명이 높은 상황이라 근심만 깊어진다.
일단 화이트가 건강하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해야 한다. 물론 더거를 앤더슨으로 성공적으로 교체했고, SSG랜더스가 외국인 농사에서 '폭망'까지는 잘 안하는 팀의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1선발로 영입했던 선수가 구상에서 이탈해버리면 팀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SSG랜더스 투수 파트의 난맥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박종훈과 문승원의 비FA다년계약이 거론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선수를 붙잡은 순간 SSG랜더스는 향후 7-8년은 선발투수 걱정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박종훈은 갑자기 난조에 빠져버렸고, 문승원은 박종훈에 비해 낫다 뿐이지 기대만큼의 활약은 해주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2025시즌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문승원이 '선발만' 했으면 좋겠다. 선발과 중간을 계속 왔다갔다 하다가 선수 생명을 심하게 갉아먹은 케이스가 바로 KIA타이거즈의 윤석민이다. 팀이 급하다고 선수의 보직을 바꾸고, 적응을 빠르게 못한다는 이유로 선수의 보직을 바꾸면 결국 몸이 망가진다.
제2의 김광현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던 오원석이 떠난 자리는 제1의 김광현이 어떻게든 메꿔야 한다. 속구 스피드가 많이 줄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난타를 많이 당했던 2024시즌의 김광현이었는데, 약간 조정된 ABS존이 김광현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게 될지도 의문이다. 송영진, 백승건, 김건우 등의 유망주들이 성장해주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보이기에 김광현이 여기서 무너져버려서는 안된다.
노/경/은으로 삼단 분리가 된다는 노경은을 FA에서 주저앉힌 건 천만다행이지만, 언제까지 노경은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다.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김민을 영입한 듯 보이지만, 김민은 KT위즈에서 쉬다가 온 투수가 아니다. 이상하리만큼 내가 채널을 돌려 SSG랜더스 야구를 볼 때면 볼 때마다 나와있는 한두솔도 아껴줘야 한다. 조병현이라는 젊은 마무리를 구한 건 다행이지만, SSG랜더스의 마무리 하면 생각났던 투수인 서진용의 부활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전반적으로 투수진의 뎁스가 얇아진 상태다. 김광현이 흔들린다고 가정하면 3선발 이후로는 다 물음표가 떴다고 봐야 할거고, 김민이 불안하다고 가정하면 2024시즌에 비해서 단 하나도 나아진 게 없는 불펜투수진을 가지고 한 시즌을 치러내야만 한다.
SSG랜더스 리뷰와 프리뷰를 작성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야수 라인업이 확실히 탄탄하다는 거다. 베테랑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박성한이나 최지훈처럼 조금씩 연차가 쌓이는 선수들이나 정준재나 박지환처럼 어린 선수들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1루의 파괴력이 약하지 않나 싶지만 그 정도는 약점이라 하기엔 어렵다. 조금씩 장수 외국인을 향해 나아가는 에레디아는 SSG랜더스를 넘어 KBO리그 역대급 외국인 타자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없는 활약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꿀 이유가 하나도 없다.
야수 라인업을 보면 감탄이 나올만큼 좋다는 생각이 드는데, 2024시즌에 거둔 수치를 보면 갑자기 '이게 뭔가?' '이게 맞나?' 싶어진다. 공격 부문에서 거둔 수치가 다 7-8위권을 오간다. 2024시즌 리뷰에서도 한 이야기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를 '야수혹사'의 문제 아닐까 추측하는데, 실상 '혹사'라는 단어는 너무나 개인차가 큰 개념이라 일괄적으로 적용시키기가 어렵다.
야구선수가 경기에 출장하는 건 직장인이 출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몸을 쓰는 일이기에 컨디션과 체력 관리는 필요하겠으나, 적어도 120경기 이상 출장하는 건 주전선수로서는 당연한 일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릴적 기억을 떠올려보면 최태원 같은 선수는 매년 전경기 출장이었다. 연속경기출전 기록이 1009경기니 말 다했다.
그러나 그 '라떼는' 선발투수가 완투 완봉을 밥먹듯 하고 불펜투수 혹사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야구 기술의 난이도가 올라가고 순간적으로 필요한 폭발력의 크기가 커질 수록 선수들의 몸이 과부하에 시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토미존 서저리가 선수 생명을 거는 일로 느껴졌지만 이제는 모든 투수의 통과의례가 된 느낌인 것처럼 선수들의 혹사는 어느새 일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출장빈도 관리도 투수 뿐 아니라 야수에게서도 고려되어야 할 사항으로 보인다.
SSG랜더스는 야수 베스트라인업도 좋고, 심지어 백업도 여느 팀에 비해 나쁘지 않다. 다만 운용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다고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타이브레이크 경기에서 추신수를 대타로 쓴 타석이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그 순간 추신수는 스윙을 할 수가 없는 몸 상태였다. 심지어 스윙을 한 추신수가 배트를 놓치기까지 했던 걸로 기억한다. 감독이 그런 선수를 출전시킨다. 상대가 추신수라는 이름값에 밀려 사구나 사사구를 주지 않는 한 의미가 없는 기용이었다. 그런 운용의 결과가 좋을 리가 없다. 애초에 그런 걸 '기용'이나 '운용'이라고 표현하는 게 그 단어들에 대한 실례다. 심지어 그건 은퇴를 선언한 베테랑 추신수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그런 장면을 보면 "선수단이 과연 저런 모습을 보고도 하나로 뭉쳐서 싸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솔직히 다는 모른다. 바깥에서 구경만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선수단 내부 분위기까지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예전 SK와이번스-SSG랜더스는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더 강한 힘을 내는 팀이었는데, 지금은 가지고 있는 것도 다 쏟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고민을 하다보면 화살이 누군가를 향하는 건 사실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그 사람과 다를 수도 있다는 점만 밝혀둔다.)
앞서 투수 파트를 예상하면서 조병현은 거의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조병현의 활약은 이제 SSG랜더스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요소다. 조병현이라는 퍼즐 단 한 개만 빼내버리면 SSG랜더스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반대로 조병현이 SSG랜더스의 9회를 틀어막아준다고 하면 이를 기반으로 최고의 불안요소로 보이는 불펜진을 재구축할 수도 있다.
2024시즌 후반기에 5위 자리를 두고 KT위즈, SSG랜더스, 롯데자이언츠, 한화이글스 네 팀이 각축을 벌이던 상황에서 개인적으로는 SSG랜더스가 가장 빨리 레이스에서 밀려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도리어 마지막까지도 레이스에서 이탈하지 않은 게 SSG랜더스였고, 끝내 타이브레이크까지도 만들어냈다.
야수진에 있어서만큼은 아직 버틸 힘이 남아있다고 보는데, 투수진에는 눈에 보이는 구멍이 많다. 당장 이 구멍을 메워줄 자원이 보이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 SK왕조 이후로 SK와이번스-SSG랜더스가 흔들릴지언정 무너진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아주 작긴 하지만 여기저기서 틈이 벌어지는 파열음이 들린다고 할까? 불안한 느낌으로 공든탑을 바라보고 있다.
스토브리그 이슈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스토브리그 중에도 SSG랜더스는 불필요한 잡음들로 시끌시끌했다. 롯데자이언츠의 모 단장님 덕분에 희화화 된 단어지만 '프로세스'가 어디선가 꼬여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돌이켜보면 다 충분히 관리될 수 있는 잡음듬이라는 점이 이 잡음을 대하는 팬 입장에서는 가장 짜증나는 부분이다.
2000년대가 지나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KBO리그도 중심이 현장에서 점점 프런트로 옮겨간다. 프런트가 얼마나 좋은 장기 전략을 세웠는가, 단기 이슈에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대처하는가가 팀 전력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반대로 말하면 팀 프론트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 그 팀은 단기간에 반짝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장기적인 성과를 구축해내는데는 실패한다.
만약 새 시즌에 SSG랜더스가 내가 예상한 정도의 성적 밖에 거두지 못한다면, 난 그 책임을 선수단에 돌리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 이대로라면 2024시즌처럼 2025시즌도 SSG랜더스 주변에는 여러 잡음이 날 것이다. 그건 마치 트럼펫이나 트럼본에 바람을 집어넣으면 정해진 높이 정도의 음이 흘러나오듯 꼬여있는 프로세스가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다. 클라리넷은 선이고 플룻은 악이라는 뜻이 아니다. 악기가 무엇이든 제 높이의 음을 찾는 조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야구단을 조율할만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