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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Feb 01. 2024

우리는 과연 어디를 향해 발을 내딛을 것인가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

1. 정치 이야기라 불편할 수 있지만 회피하지 않고 이야기를 출발해보자. 평론가들은 선거의 변수를 대략 세 가지로 묶어서 설명한다. 구도, 인물, 이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도라고 하지만 대선쯤 되는 큰 판이 벌어지면 다른 선거보다는 이슈가 조금 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이슈는 다른 말로 시대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이 담론을 선점하는 쪽이 아무래도 다른 후보들 보다는 유리하게 판을 이끌어나갈 수 있게 된다.


지난 세 번의 대선을 복기해보자면 중간에 끼어 있는 문재인은 어떤 이슈를 부각시키기에는 탄핵이라는 구도가 너무 거대해서 선거기간동안 막상 어떤 말을 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그보다 앞선 박근혜와 나중의 윤석열은 선명한 편이다. 박근혜는 경제민주화였고, 윤석열은 공정과 상식이었다.


놀라운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둘 모두 그들의 집권과 동시에 자신들이 선거기간동안 말했던 것과 정확히 역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역행을 비판해야 할 언론분야가 전혀 작동하질 않아서 아예 담론 자체가 증발해버린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외쳤던 주장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신기루 같다. 여기서 굳이 하나를 더 보태서 세 번째 놀라운 사실을 짚자면 표를 던진 대중들 조차도 담론의 실종에 대해 '정치는 다 그런거지' 라며, 원래부터 그런 게 당연한 일처럼 대한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공론의 장은 망가진 채로 방치된다. 당연히 공동체의 의미도 희석된다. 어떤 문제제기를 해도 공동체가 합리적이고 올바른 해답을 도출해주길 기대할 수 없다. 그 결과 사회 구성원들 개개인은 당연히 각자도생의 길로 빠져버리게 될 것이고, 다시 공동체는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2. 꼭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21세기 들어서 수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히틀러를 잊어버린 것처럼 포퓰리즘의 외투를 입은 극우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다시 나타난 트럼프의 그림자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고, 혁명의 나라 프랑스도 이대로면 르펜일지 모른다는 불길한 소문이 돈다. 예전 같으면 스스로 부끄럽거나 혹은 다수의 합의된 배제를 통해 공론의 장에 나서지 못했을 목소리들이 거리낌 없이 자유라는 미명하에 표출되고 있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 독재정부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에서마저 보이기 시작하는데, 합계 투표율이 100%가 넘는다는 러시아는 그렇다 치고, 중국은 그들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 내부 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칙을 벗어버리고 이젠 아예 일인 영도체제란 사실을 숨기지도 않고 있는 듯 하다.


그러다보니 어느 나라를 보아도 놀라우리만큼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다. 리더는 있지만 리더쉽은 보이지 않는다. 구심력이 약화되다보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통제와 억압이 강화된다.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토론도 사라진다. 다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른다. 자포자기하듯 아무 문제 없다는 소리를 믿고 싶어진다. Don't look up! 타이타닉이 빙하에 부딪혀 이미 천천히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악단은 여전히 연주를 하고 있고, 무도회장의 웃음소리는 천진난만하게 울려퍼지고 있다. 비극은 시간문제일 뿐인 것 같다.


3. 이 글을 쓰기 전 먼저 기사를 찾아봤다. 마이클 샌델을 한국에 알린 이 '정의란 무엇인가'가 판매 100만부를 돌파했다는 기사의 작성년도가 2011년이었다. 내가 가진 책도 2014년도 판본인데 무려 40쇄를 찍었다. 이 책이 팔린 양만 따지면 책을 조금 가지고 있다는 집의 책장에는 거의 대부분 이 책이 꽂혀있다고 이야기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사회가 지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오래된 불안감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어느정도는 증명해주는 수치 아닐까?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이전에 이 책을 어떻게 읽었던 걸까?" 눈에 새로 들어오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만 이렇게 겉핥기로 읽고 끝냈던 건 아닌 거 같다." "다들 이 책을 제대로 읽기는 한 걸까?" 정말 아쉽게도 어디가서 조금 있어보이는 화젯거리로서 책 초반에 나오는 '기차사고실험'만 유명해진 건 아닐까? 레버를 당길 것인가? 사람을 선로 위로 떠밀 것인가? 그건 사실 이 책에서는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책은 천천히 유럽의 사상의 큰 줄기를 따라가면서 '정의'와 관련된 사회 담론이 어떻게 변하고 보완되는가를 살펴보고 마지막에는 샌델 교수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구성을 갖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샌델 교수가 이 사상의 흐름과 대척점제대로 편집을 해뒀기에 나같은 비전문가도 충분히 재미있게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최대 다수 최대 행복'으로 유명한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로 출발한 이야기는 공리주의의 한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바로 반박해버리고, 다시 벤담의 후계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가만 보면 밀이 과연 공리주의를 계승한 것인지 스스로 반박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상황도 잘 설명해준다.


공리주의와는 일차적으로 반대적인 포지션을 갖게 되는 자유지상주의의 경우는 거의 다룰 가치가 없다는 듯 바로 반박하고 지나가고 대신 그 자리에 칸트와 존 롤스를 가져와서 자유주의의 대표격으로 각각 한 장씩 할애하여 자세하게 다룬다(솔직히 최선을 다해 쉽게 풀었어도 칸트가 가장 지루하다). 아무래도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의 틀이 이들에게서 왔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4. 샌델 교수는 여기서 갑자기 시간선을 역행시키는데, 그는 결론으로 가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등장시킨다. 이 부분이 솔직히 무척 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일차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들고 오는 게 과연 안전한가 하는 점인데, 샌델 교수도 이 부분의 취약성을 지적하는 자유주의 쪽의 논거를 스스로 제시하고 그 뒤 반론을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반론이 충분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나 사회 전체가 어떤 '목적'을 갖는다는 게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건 80여년 전 히틀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만 해도 반공과 잘살아보세의 기치 하에서 수많은 사법살인이 자행된 나라다. 시간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자면 현재 중동지역에서 맹렬하게 불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 같은 것도 다 사회가 가진 '목적의 광풍'이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올바른 사회'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은 의외로 어마무시한 것이어서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색채마저 지닌다. 잘못된 목소리가 시민권을 넘어서서 지배력을 갖기 시작하면 그 파급력은 제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고 결국 스스로 붕괴하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된다. 당연히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피해자가 양산된다.


우리가 당장 일본 제국주의, 전체주의의 피해자 아닌가? 731부대 같은 인류가 벌일 수 있는 최악의 범죄 마저도 그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은 자기 공동체의 승리를 위한다는 놀라운 목적의식을 가진 채, 스스로는 어떤 숭고함을 느끼면서 행동했을 것이라 생각하면 '목적'과 '올바름'이란 단어가 가지는 파괴력이 과연 제어가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기때문에 공동체가 어떤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세해버린 상태가 차라리 나은 것 아닐까?


이런 논쟁은 영화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는 목적론이라는 원자폭탄을 다시 제조할 것인가?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5. 그러나 결론으로 다가서는 샌델 교수의 이야기를 다시 오펜하이머에 비유하자면 바로 이 것이다.


"우리가 원자폭탄(공동체가 갖는 목적의식)을 포기한다고 해서, 저들(극단주의자)도 동시에 원자폭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샌델 교수의 지적은 지금 이 시점에 와서는 더더욱 뼈아프다. 그대로 옮겨보자.


"민주 시민에게 공적 영역에 들어갈 때는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내려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관용과 상호 존중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가능하지도 않은 중립을 가장한 채 중요한 공적 문제를 결정하는 행위는 반발과 분노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중요한 도덕 문제에 정치가 개입하지 않으면 시민의 삶은 저하된다. 사회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 쉬워진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건드리기 두려워하는 곳에는 근본주의자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다시 히틀러를 떠올려보자. 당시 모든 독일국민들이 히틀러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때 히틀러의 등장을 간과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광기어린 목소리를 제어해야 한다는 의견보다 '우리는 자유를 보장해'라는 게으른 목소리가 더 컸다.


건강한 몸은 암세포가 출현해도 자연스럽게 자체적으로 그것을 처리한다. 문제는 암세포에 혈관이 연결되고 양분이 공급될 만큼의 크기로 자란 다음이다. 이때는 빠른 발견과 외부의 개입이 없이는 몸의 항상성은 백퍼센트 붕괴하는 길로 나아간다.


히틀러와 같은 암세포가 자라나기 전 그것을 파괴해서 사회의 건강을 지키는 역할을 주로 '올바른 개인의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신념'이 담당한다. 지금 우리의 중립성에 대한 병적인 집착, 그리고 전통적인 도덕관과 종교성에 대한 맹목적 배타주의는 면역세포를 잡아가둠으로서 암세포가 사회에 번지는 걸 도와주는 상황을 초래한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사회에서 종교성의 저하가 가져오는 문제는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장에서 종교가 배제되기 시작한 이후 종교와 극단주의의 결합이 이뤄진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다. 면역세포와 암세포가 결합해버린 꼴이다. 개중 건강한 면역세포가 활동을 하려해도 사회는 그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걸 지성인양 포장한다. 이게 반복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버락 오바마의 연설 한 대목은 주의깊게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삶에 목적의식이, 서사적 궤적이 필요해졌습니다. (중략) 우리가 진정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말해 주고 싶다면, 다시 말해 우리 희망과 가치를 그들의 희망과 가치와 관련지어 소통하고자 한다면, 진보주의자인 우리는 종교적 담론이라는 영역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6. 사회적 공론의 장에 종교적·도덕적인 담론이 다시 진출하기 시작하면 그 곳은 당연히 시끄러워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공론의 장은 원래 시끄러운 곳이다. 우리는 상대의 말을 소음이라 생각하지 말고 귀기울여 듣는 연습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공론의 장이 폐쇄된지 너무 오래되어서 과연 다시 그 장이 열린다 해도 과연 우리에게 그 '과정'을 인내할 힘이 남아있는가 하는 의문은 있다. 이 '정의란 무엇인가'가 나온 이후로도 사회는 점점 더 극단화, 파편화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소통의 도구로 생각했던 스마트폰은 도리어 알고리즘의 세례를 받으며 더더욱 개인의 생각을 극단화시키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다시 공론의 장에 모여 이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공동선'의 방향성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극단주의가 던진 핵폭탄에 모든 것이 무너진 후 그 폐허에서야 가까스로 다시 시작하게 될까?그때라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게 혹시 내 어리석은 희망은 아닐까?


7. 여러 곳에서 이제 민주주의의 다음 스텝을 고민해봐야 할 때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철학이 답이 없으니 이제 기술이 답을 할 차례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나도 가끔은 차라리 AI에게 사회질서를 맡겨버리는 게 편하지 않을까 하는 공상도 해본다.


우리는 실로 여러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다. 인구감소나 사회 생산성 약화, 기후 위기, 정치 경제의 블록화로 인한 세계 3차대전 가능성 등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보다 나는 철학의 부재가 최악의 문제라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그렇게 오래 헤맸는데 돌고돌아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라니 이게 무슨 아이러니한 시츄에이션인가.'하고 경악을 하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샌델 교수는 결론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의 발호에 맞서 이 사회의 공동선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이들의 참여를 독려한다. 이 '참여'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한 문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1946~2009]


샌델 교수는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 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목사님 중 한 분인 김동호 목사님께서 예전에 한 라디오 인터뷰에 나와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자꾸 이 사회에 정의가, 도덕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우리가 언제 정의를, 도덕을 세워본 적이 있습니까? 세운 후에야 무너지는 것이죠, 우리는 사실 제대로 세워본 적도 없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힘이 생긴다. 무너진 폐허에서 다시 잔해를 치운 다음 세우는 게 아니라 우리는 어쩌면 이제야 사회의 공동선을 향해서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하고 힘겨운 길일테고, 수많은 승냥이들이 우글거리는 캄캄한 미로일테다. 그러니 미리 포기하지는 말자. 그렇다. 가장 중요하는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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