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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Feb 15. 2024

스쳐지나가는 모든 사소함을 위하여

존 윌리엄스「스토너」

1. 성경의 시가서인 '욥기'는 읽기가 꽤 어려운 책인데 그건 많은 사람들이 선입견 때문에 책의 시작을 쉽게 잊어버려서 그렇다.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기 1장 1절, 개역개정]"


오죽하면 뒤에서 욥을 두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까지 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1장 8절, 개역개정]"


욥기를 읽을 때는 이 사실, 즉 '욥이 의인이다.'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모든 게 꼬여버리고 만다. 뜬금없이 왜 성경이야기나고? 이 책 '스토너'의 구성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윌리엄 스토너에 대해서는 이런 '정의'가 미리 내려져 있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략) 스토너의 동려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존 윌리엄스 소설「스토너」 중에서


그는 결코 '훌륭한' 인물이 아니다. 그냥 어디서든 스쳐지나갈 법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잠깐 이 땅에 머물다가 사라진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다. 역사적 의미에서는 기억할만한 가치나 족적 같은 게 있을리 없다. 어차피 잊혀질 이름인데 그가 '스토너'이든 '로버트'이든 '잭슨'이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다. 그의 죽음을 기리며 동료들이 기증한 책처럼, 그는 누군가에 의해 펼쳐지기 전까지는 그저 묻혀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심지어 펼쳐보아도 그의 삶은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2. 작가는 그 평범한 인물의 이야기를 느리고 차분하게 풀어놓는다. 부모는 선진 농업을 배워오길 희망해서 스토너를 대학으로 보냈으나, 그는 그 기대를 배신하고 갑자기 문학도로 변신해서 영영 대학에 남기로 결정한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전장으로 달려갔다. 전쟁은 그의 친구중 가장 특별했던 이도 삼켜버렸으나, 그는 다른 이들의 비난섞인 눈초리에도 대학을 떠나지 않는다.


이후 그는 잠깐 찾아온 사랑의 열병에 취해 부인을 맞는다. 하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솔직히 실패였다. 둘은 애초에 많은 것이 달랐다. 이혼을 하진 않았지만 심각한 성격차이로 마치 전쟁같은 나날을 보낸다. 학교에서도 종신 교수자리를 얻어내지만 동료와의 불화로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 다시 서로의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진짜 사랑이 있었으나 그녀도 결국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사랑스러웠던 딸도 탈출하듯 결혼을 하고 부모를 떠나간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는 마치 자신이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 만났던 늙은 괴짜 교수와 똑닮은 형태로 늙어간다. 그리고 은퇴를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런 병을 얻어 사망한다.

3. 이야기는 실제로 대단한 사건이랄 만한 것이 없다. 물론 스토너 본인의 시점에서야 하나하나가 다 인생의 큰 굴곡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 시절에 들을 수 있는 다분히 일상적인 일들의 점층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초반에는 확실히 느리고 답답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의 템포와 나의 리듬이 맞아 떨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무언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아내와의 갈등이 천천히 차오르는 부분을 읽다보면 안들어도 결말이 훤히 보이는 일일드라마식 파경 아닌가 싶어서 솔직히 실망스러울 정도다.


그에게는 인생을 반전시킬 수 있는 찬스가 주어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생을 그대로 고꾸라뜨릴만한 위기도 보이지 않는다. 꾸벅꾸벅 졸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드넓은 황야를 달려가는 느린 트랙터마냥 이야기는 저궤도를 천천히 활공했다가 느리게 하강하고 끝나버린다.

4. 이쯤되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법 하다. 이런 이야기를 대체 왜 읽어야 하는가? 다 읽어봐도 처음의 평가는 딱히 어긋난 게 없다. 그의 인생은 냉정하게 보면 실패작이고, 너그럽게 봐도 범작 이상이 결코 아니다.


평생 섰던 대학 강단에서도 인정과 존경보다는 괴팍한 노인네 취급이나 당했고. 저서나 논문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고, 가정생활은 시작부터 끝까지 삐걱거렸고, 하나 밖에 없는 딸은 알콜중독이 되어 자신의 아들 하나 건사조차 못하는 걸로 보인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이정도면 우리가 읽고 난 후 얻을 교훈이나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 할 수 없다. 맞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 읽고나면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저 윌리엄 스토너라는 한 인간의 생을 단순하게 나열한 느낌이 아니라, 마치 세상이 그의 인생에 '실패'라는 낙인을 찍으려고 하자, "그의 평생이 그렇게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입니까?"라고 누군가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써놓은 '최후변론'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든다.

마지막 지점에 서서 결과물만을 가지고 그의 인생을 평가하면 그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진 못할 거다. 하지만 일부러 작가는 그의 인생을 천천히 따라 읽어줌으로서 우리의 시점을 묘하게 바꿔놓는다. 정말 그가 그렇게 고독하기만 한 것일까? 정말 그가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거나 남기지 못하고 산 것일까? 정말 그의 삶이 그렇게 무가치하다고 평가되는 게 맞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따뜻함이 남는다. 위로를 받는다. 그렇다. 우리도 수많은 순간 우리의 삶이 가진 무의미함과 무가치함 때문에 두려움에 빠진다. 작가가 스토너의 삶을 나란히 걸어준 것처럼 우리의 삶도 누군가가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매순간을 하나하나 변호해줬으면 좋겠다. 이 답답하고 고독한 인생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도 그렇게 누군가가 편들어줬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며, 이 순간엔 이런 빛이, 이 순간에는 이런 따뜻함이 있었노라고 누군가 목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 이건 어쩔 수 없었노라, 그래도 최선을 다했노라, 이건 다른 사람들의 오해였노라, 당신이 그 때 거기에 있었기에 누군가가 잠깐이나마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행복했었노라, 그리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5.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재조명된 소설이라는데 아무래도 우리들의 삶이 더 많은 변호가 필요해진 시절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세상이 하도 평범한 삶을 벼랑으로 몰아 떨어뜨리다 못해 아예 맷돌로 갈아 가루를 만드는 시절이니까. 어떻게든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라고 주입하는 시절이니까.


스토너의 삶이 아니라, 그 을 바라보고 기술하는 목소리와 태도에서 더 많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우리가 각자 옆에 있는 누군가의 삶을 이렇게 너그럽게 적어내려가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옆에 있어서 가깝고 잘 보인다는 이유로 더 많은 약점을 찾고, 더 상대를 몰아붙이고만 사는 건 아닐까? 마치 트레이너처럼, 마치 우리가 그렇게 상대를 완성시키는 책임이 있는 것처럼 구는 건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의 옆에 있다는 건 그의 삶을 더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그를 변호해주고 감싸주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누군가의 옆에 있는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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