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비 Feb 22. 2024

결국 미완성으로서 완성되다

프란츠 카프카「소송」

1. 내 이야기로 출발해보자. 우리나라 경찰이 수배를 하는 형식은 크게 셋으로 나뉘는데, 이걸 난 A체포, B벌금, C통보로 외웠다. 전투경찰로 군 생활을 경찰서에서 했고, 일년 넘게 초소 근무를 했었는데 거기서 내가 했던 일이 바로 수배범 잡는 거였다.


수배범이라 하니 무시무시하게 들리고 직원들은 실탄이 든 권총을, 나는 가스총을 차고 근무를 했으니 뭔가 있어보일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벌금을 안내서 벌금 낼 때까지 잠깐 잡혀가는 경우다. 예비군 출석 안해서 내는 벌금이나, 음주운전 벌금이 꽤 많았다. 가끔 수사에 출석을 안해서 수사 통보 확인서를 써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보다 더 희귀한 게 체포영장이어서 많아야 한 달에 한두 명 꼴이었지 싶다.


초소에 있으면서 여러번 체포영장 집행을 도왔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경우는 딱 두 번이다. 한 번은 내 활약이 빛났더랬다. 일단은 벌금으로 사람을 잡아들였다. 지구대에 인계해서 벌금만 내게 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신분증하고 사람 얼굴이 안맞지 싶더라. 그래서 지문번호 확인을 해서 다른 사람인 걸 알아낸 다음 진짜 주민번호를 받아보니 폭력으로 체포영장이 떨어진 수배범이었다. 안잡히겠다고 친구 신분증을 들고 다녔는데, 유유상종이라고 친구 앞으로는 벌금수배가 나와있었던 거였다.


나머지 한 번은 사기범이었다. 30대 중반쯤 됐을까 싶은 여성이었는데 단속을 나갔던 후임이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같이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나 엄마나 차림이 남루했고 오랫동안 씻지도 못한 것 같았으며 눈빛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지구대 경찰이 올 때까지 아이와 엄마를 초소 의자에 앉혀뒀는데, 그때 예닐곱살 쯤 되었을 것 같은 그 아이가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얼마나 괴물같아 보일까 싶더라.


여하튼 영장이 없이 체포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체포를 했다 한들, 그게 유무죄를 가르는 게 아니다. 이상하게 우리나라는 구속 영장만 떨어지면 유죄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유죄는 법원의 최종판단이 나와봐야 아는 거고, 살다보면 법원의 판단이란 걸 믿어야 하나 싶을 때도 많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

2. 하필 내 경험 탓이었을까? 이 이야기의 초반은 진심 읽혀지질 않았다. "이게 말이 돼?" 를 넘어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로 가득했다.


첫 서너페이지를 읽는데 머릿속이 온통 '?????' 이렇게 변했다. 오죽하면 내가 뭔가 잘못 읽고 있나 싶더라. 한두 페이지를 통으로 뛰어넘긴 게 아닐까 싶고, 누가 페이지를 뜯어가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럴리가... 선물받은 건데.) 너무 이상해서 처음부터 새로 읽기도 했다.


초반 내용이 이렇다. 어느날 아침, 이야기의 주인공 요제프 K는 느닷없이 체포된다. 그를 체포하러 온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정작 그가 왜 체포된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어쩌면 그들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의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그는 결정적으로 체포영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흔히 '체포'라고 하면 잠깐이라도 인신을 구속시키기 마련인데, 그는 K를 구속하지도 않는다.

K가 물었다. "체포된 거 아니었소?" K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중략) 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체포된 사람이 어떻게 은행에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아, 알겠습니다." 어느새 문 앞에 이른 감독관이 말했다. "내 말을 오해했군요. 당신이 체포된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장에 나가 일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일상생활도 방해받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체포되는 것도 그다지 나쁠 건 없군요." K는 이렇게 말하면서 감독관에게 다가갔다. "난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감독관이 대답했다. "체포 사실을 알리는 것도 꼭 필요한 일 같지는 않은데요." K가 더 가까이 다가서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모두가 문 앞의 좁은 공간에 모여 있었다. "그건 내 의무였습니다." 감독관이 말했다. "참 한심한 의무군요" K가 집요하게 말했다.

프란츠 카프카 「소송」 중에서

3. K는 그렇게 갑자기 피고인 신분이 되어 하급심에 출석한다. 이 하급심이 벌어지는 장소 또한 기괴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머릿속에 담고 있는 장중한 법원의 이미지를 떠올려서는 답이 나오질 않는다. 우리로치면 연식이 이제 50년에 가까운, 5층짜리 나홀로 아파트나 무슨무슨 '맨숀' 같은 곳의 몇 칸을 법원으로 쓰고 있는 꼴이다.


애니메이션으로 치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상황에 따라 모습을 변신시키듯, 가정집의 부엌 문을 열고 나가자 재판정이 튀어나오고, 다락문을 열자 법원사무처가 나오고, 하는 느낌이다.


이쯤부터는 차라리 머릿 속에 무대를 꾸며버리는 게 낫지 싶어졌다. 이해하기를 어느정도 포기하고서 머릿 속에서 연극을 시작한다. 소동극 같은 재판장면은 차라리 뮤지컬이어도 좋겠다. 그렇게 읽자 갑자기 장면이 다채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미가 느껴졌다. 어떤 시점에서는 도를 지나쳐서 신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신기한 것은 소송이 시작된 이후다. 전에는 몰랐고 느끼지 못했는데, K는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두가 어떤 모습으로든 소송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대성당의 신부조차 소송 관련자다. 우리가 늘 그림자를 달고 살아가듯이, 소송은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딸려있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K는 어떻게든 자신이 무죄를 받을 방법을 찾아 헤매지만 마주하는 건 막다른 길 뿐이다. 놀랍게도 모두가 K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 소송에 끌려나오게 된 것인지 알고 있다는 태도를 취하지만, 그에게 빠져나갈 수 없는 유죄의 굴레만을 말할 뿐, 정작 K가 지은 죄를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

4. '소송'은 그럼 대체 무엇일까? 해석은 열린 것이니까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 싶다. 종교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죄인이라 낙인 찍고 그가 왜 죄인인지는 잘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종교에 갖고 있는 불만을 정곡으로 찌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야기를 표면 그대로를 받아들이자면 부조리한 관료제도를 보여주는 수단 일 수 있다. 시스템이라고 겉모습은 갖춰놓았지만 정작 실체는 하나도 없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처음 왜 생겨났는지, 목적은 완전하게 휘발되어버리고, 마치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거기 복무하고 있는 인간들의 밥벌이만이 목적인 양 움직이고 있는 괴물같은 관료조직을 풍자한 것일 수도 있다.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소송'을 '삶'으로 대입하고 읽었다.

요제프 K가 갑자기 소송에 끌려나온 것처럼, 우리는 선택한 적 없는 삶의 현장 속으로 끌려들어왔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내 삶보다 더 본질적이고 혹은 더 찬란한 저 너머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분투하지만(무죄), 그런 선택지는 처음부터 주어진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변호사의 발가락 사이를 핥는 처지가 되더라도 소송을 영원토록 질질 끌어보든가, 아니면 유죄를 선고받고 파멸하든가, 결론은 둘 중 하나 뿐이라는 절망섞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온갖 부조리와 몰지각이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탈출구를 만들어내기 위해 미친듯 뛰어다니지만, 찾아가는 모든 곳에서 날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세상의 구조만 새삼 확인하게 된다. 심지어 신을 찾아가도 신의 대리인조차 소송 관계자로 변신하여 문지기처럼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종장에 이르러 채석장에 끌려간 K가 심장에 칼을 맞고 죽어가며 욕을 내뱉는 것처럼, 인생은 그렇게 시작이 그랬듯 갑자기 죽음이란 집행이 이뤄진다. 끝내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을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 인생이다.

5. 내용만 들으면 그저 우울하고 끔찍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다 읽고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상한 방식의 격려를 받은 느낌이랄까?


진짜 우울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되려먼 요제프 K가 어느 순간에는 확실히 자신을 놓아버려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고 힘겨워할지언정 이 소송의 굴레 속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놓지 않는다.


K의 치열한 분투만큼은 순도 100퍼센트다. 그에게 어떤 위로가 있다거나, 그에게 어떤 희망이 있거나, 혹은 조력자가 있다면 그의 분투는 잠깐의 치기에 불과해질지도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K의 분투만큼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다. 그 상황 속에서 그는 쓰러질지언정 포기하거나 체념하지도 않는다.


카프카는 이런 게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떤 빛나는 존재에 이끌려가는 반사체로서 작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빛이 있든 없든 의미가 남든 안남든 그저 나 스스로이고자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려고 한 건 아닐까? 그게 인간이 '존엄'하다는 의미 아닐까?

6. 이 이야기는 미완이다. 카프카는 이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을 정해둔 다음 중간을 채워나갔다고 한다. 그러다 그가 40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중간이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난 이게 정말 미완인가 싶어졌다. 카프카에게 더 오랜 시간이 주어졌더라도 어쩌면 이 소설은 이렇게 다 채워지지 않은채로 그의 죽음을 기다리며 남겨져있지 않았을까?


그의 실력이 모자랐다는 뜻은 아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랬다지 않나. 자신은 대리석 속에 갇힌 형상을 꺼내 줄 뿐이라고. 그러다보면 때로 돌 속에 영영 갇힌 부분이 남아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억지로 꺼내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미완일지 몰라도, 작품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카프카가 남겨둔 이 빈 공간도 이미 완성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7. 이 빈 공간 속에서 주인공 요제프 K가 얼마나 더 헤매야 했을지, 비틀거려야 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그의 어떤 시도도 결국 그를 구해내지 못했으며, 그는 결국 진짜 판사는 본 적도 없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욕설 한 마디는 우리에게 그가 공백 속에서도 끝까지 싸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것이 삶이라도 그는 끝내 회피하지 않는다.


텅 빈 미완성의 공백이 울림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공간과 이 이야기의 공백이 너무 닮아있어서다.


그렇다. 이 책은 미완성으로서 그렇게 완성된다. 이 책이 가진 진정한 의미로 나아가는 문을 열기 위해서는 우린 각자가 가진 삶의 분투를 가져와 이 빈 공간 안에 끼워넣어야 한다.


대신 여기엔 조건이 있다. 어떤 희망도 가져오지 말 것. 어떤 위로도 미리 챙겨두지 말 것. 순간 후회할 시간조차도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가는 치열함으로 바꿀 각오를 할 것. 이 끝에 초라함과 치욕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도 결코 물러서지 말 것.


이 쯤 되어야 언어로 만든 알싸한 위스키 한 잔이 되는 게 아닐까? 도통 알 수가 없다. 왜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도리어 인간다움을 느끼고 묘한 이끌림을 느끼는 것일까? 풀 한 포기 마주하기 힘든 텅 빈 광야에서 늘 신성을 찾았던 오래 전 선조들처럼 우린 또 이 언어로 만든 광야를 헤매며 새로운 인성의 빛 한 줄기를 찾아 계속 헤매야 하는 것일까?


이전 05화 스쳐지나가는 모든 사소함을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