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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Mar 07. 2024

그대 부끄러움은 별이 되고 나는 부끄러워 눈물 짓는다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끄러워했던 시인, 윤동주. 우리는 그의 대략적인 약력 정도만 주입식으로 배워 알고 있다. 북간도에서 태어났고, 평양 숭실중학교,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 끝에 사망했다.


그의 시는 수능 출제 지문으로 익혔으나 아름다웠다. 사실 그의 삶 자체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20대 후반쯤 접했던 한 만화에서 윤동주의 사망 원인이 '생체실험'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때 난 그 사실이 너무나 서글펐다. 그가 당했을 고통과, 그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았다는 부끄러움과, 왜 그런 사실을 어디서도 배워본 적이 없는가 하는 분노가 뒤섞인 끝에 맺힌 게 결국 서글픔이었다.


2. 지난 달 부모님과 부산여행을 다녀왔다.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간 나는 넷플릭스에서 뭘 볼까 하다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틀었다. 사실 이 영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봐야겠다는 마음만 먹었을 뿐 차마 시작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어떤 내용인지 잘은 몰랐으나, 그 결론은 결국 서글플 것이었으므로.


영화 평이야 다 갈리겠으나 난 무척 좋았다. 어쩌면 이미 시작전부터 좋기로 정해져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으나, 배우진부터 흑백톤까지 워낙 취향저격이어서 좋다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는 영화였다. 중간 중간 윤동주 역의 강하늘 씨가 읊어주는 윤동주의 시들이 아바(ABBA)의 노래들로 꾸며진 뮤지컬 맘마미아처럼 잘 어울려저서 꽤 신선했다.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실화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윤동주는 정말 그렇게 '모두가 시인의 마음을 가져야만 세상이 변화한다'고 믿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더더욱 좋았다.


영화는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는 동주의 회상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누군가는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 단정적으로 '생체실험'으로 다뤄진 것을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고, 증거가 있느냐 할 수도 있고, 또 애먼 색깔을 뒤집어씌우며 누구보다 희번덕해진 눈을 하고 덤벼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영화가 그 사실을 회피하지 않아서 더더욱 좋았다.


이렇게 찬란한 시인의 몸에 소금물 주사를 넣으며 실험을 하는 건 그때 일제만의 만행이 아니다. 지금도 몇 푼 돈에 넘어가서, 한 줌 권력에 취해서 그런 짓을 벌이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알면서도 저지르고, 모른 체 하면서 또 저지른다. 윤동주는 그런 탐욕과 어리석음에 짓밟혀 죽었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여전히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처럼.

3. 난 시를 잘 모른다. 그냥 뭔가 활자를 보고 싶은데 긴 글이 부담스러울 때 마치 예전 500원주고 가판대에 꽂힌 스포츠신문을 뽑아보듯 시집을 펼쳐보는 수준이다.


예전 고등학교 시절 날 가르치셨던 시작법반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시집 한 권 안에서 마음에 닿는 시 한 편 있으면 그게 본전이라고. 난 그렇게 시인에게서 시는 배우지 못하고 시를 셈하는 법만 배웠다. 그런 내게 윤동주는 아스라이 멀다. 별이 그렇게 멀듯이.


그런데 어쩌면 윤동주는 쉬워서 더 멀리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언어는 무척이나 쉽다.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일부러 찾아볼 필요도 없고, 이 문장은 어디에 가져다가 붙여 읽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괜한 단절도 없다. 내 수준에도 읽을 수 있다.


물론 읽긴 해놓고 그의 깊이에 다다르진 못하는 서글픔은 있다. 그래도 그의 시는 일단 나같은 무지렁이도 초대해서 꽃이 만개한 그의 뜰 안에 거닐게 해준다. 멋대로 핀 꽃 몇 송이 꺾어도 그는 싫은 내색 없이 내버려둔다. 봄엔 봄의 언어들이, 여름엔 여름의 호흡들이, 가을엔 가을의 눈물들이, 겨울엔 겨울의 한숨들이 절로 피었다고 지고 피었다가 지며 매번 그의 뜰을 거닐 때마다 늘 다른 향기와 빛깔로 날 물들인다. 어떻게 이러지 싶다. 그리고 또 다시 '우린 이런 그를 어떻게 잃어버렸지...' 한다.

4. 워낙 유명한 시들이 많지만 이번에는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시가 몇몇 더 있었다. 물론 이 시들이 예전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건 둔한 내 눈과 답답한 내 가슴 탓일테다.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郊外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5. 그의 생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그는 또 어떤 시들을 썼으려나. 그 시는 또 얼마나 우리를 울렸으려나. 그의 삶은 또 얼마나 우리를 부끄럽게 했으려나.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어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그래, 밤마다 밤마다 거울을 부지런히 닦아보자. 윤동주가 부끄러움과 슬픔으로 걸어갔던 그 길 위에 나도 한 발작을 내딛어보자. 피할 수 없는 운석 아래로 걸어들어가는 슬픈 형제의 뒷모습을 따라 나도 같이 걸어가보자. 윤동주보다 훨씬 늙어버린 몸뚱아리가 되어 여전히 윤동주보다 못난 참회를 하는 나의 부끄러움을 등에 짊어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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