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이야기에 앞서 내 가정사를 잠깐 풀어보겠다. 나의 다른 글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어느정도 감을 잡으셨겠지만, 난 개신교도다.
모태신앙 중의 모태신앙으로 내가 5대째다. 동네에서 훈장을 하시던 고조 할아버지 때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우리나라 장로교 역사에는 평양 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처음 받은 일곱분이 나오는데, 그 중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셨던 이기풍 목사님이 우리 본가가 있던 지역에 오시면 우리 본가를 숙소 및 예배당으로 쓰셨다고 한다.
내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귀가 안좋으셨는데 그걸 미국 선교사님의 알선으로 그 시절 외과수술도 받으셨다. (그로인해 할아버지는 뼛 속 깊은 친미파셨다.)
집안 자체가 개신교 문화에 푹 담궈져 있다고 보면 된다. 평생 제사 지내본 적 없고, 반대로 크리스마스에 교회 말고 다른 곳에 가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도 장로교 장로셨고, 아버지도 장로시니 어릴 적에는 솔직히 "나이 먹어 할아버지가 되면 다 장로라고 부르나보다."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지금보다 어릴 적에는 목사 하라는 소리도 꽤나 들었다. 날 가르치시거나 잘 아는 목사님들 중에 넌지시 권하신 분도 몇 분 계신다. 교만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못할 자신도 없었다. 했다면 꽤 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어서 그 길을 가지 않았다.
하나는 일단 내가 누군가를 깊이있게 아끼는 마음이 없다는 거다. 목사라면 적어도 '영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더라.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모임 리드를 할 때면 신기하게도 상대가 끌려들어오는 걸 느꼈다. 이건 목사가 아니라 무당이나 구루 스타일이다 싶었다.
요 두 가지를 조합하고 보니 나란 놈이 목사 타이틀을 가지게 되면 언젠가 내가 극혐하는 사이비 노릇을 하고 있겠구나 싶은 섬뜩함이 들어서 그 길은 포기했더랬다. 솔직히 사는 게 팍팍하다보니 지금에 와서는 가끔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승적인 차원에서는 충분히 잘한 일 아닌가 싶기도 하다.
2. 모태신앙이라 하면 기성 기독교에 대해 나이브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우를 꽤 많이 보긴 하는데, 그것도 미안한 표현으로 2대 3대쯤 될 때나 하는 소리다.
물론 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십자군 전사 케이스는 아니다. 그러나 난 내가 모태신앙인 것과 개신교도인 것을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 세계관과 인간관의 뿌리가 거기 내려 있음은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축복이다.
물론 한국 개신교에 대한 비판을 하자면 나보다 더 심하게 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거다. 속사정 잘 아니까 아픈데만 골라서 팰 수 있다. 심지어 친구처럼 지내는 친한 목사님도 계시고, 또 사촌 매형이 목사님이기도 하시다. 그 치부가 너무 훤하게 보여서 몰랐으면 싶은 부분도 꼬꼬마 어릴 적부터 듣고 보고 자랐기에 아예 이젠 그러려니 하는 게 체화되어 있다.
그래도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이상한 부류들보다도 더 싫은 건 기독교에 대해 통달해서 제멋대로 재단하고 까내려도 되는 줄 아는 '기독교 출신입네', '나 교회 다닙네' 하는 부류들이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얼마나 깊이 노력하고 봉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보기엔 결국 겉핥기 아니었을까 싶을 따름이다.
내가 누구를 판정할 수는 없는 수준이겠으나 이건 분명하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찍어 맛만 봐도 알 수 있다. 기독교, 결코 쉽지 않다. 정말 만만하지 않고, 마음대로 내가 '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기독교다.
다시 말하거나와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삼척동자도 알 수준임을 인정하지만서도 나는 가장 맨 앞에 나서서 그 문제투성이의 집단을 향해 잔혹하게 칼질을 해대면서 '쟤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네, 정신이 온전히 박혔네'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차별화를 하려는 시도가 결코 기독교적일 수 없음을 안다.
내가 존경하는 박영선 목사님은 남들이 욕을 하면 같이 욕 먹고 서 있자고 하신다. "당신네 교회는 문제 없어?" 라고 물으면, 웃으며 "다행히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습니다."하고 말라고 하신다. 이게 기독교도 아닌가?
3. 이 책은 유튜브 겨울서점 영상을 보고 알게 되었다. 김겨울님은 무신론자로 알고 있고, 이 책의 저자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절로 의심이 가득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를 가장 비기독교이게 하는 사람들은 무신론자인가? 다시 말하거니와, 아니다. 세상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세상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해내려는 많은 시도가 기독교를 어지럽게 만든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나 미국 보수교회에서 가르치는 '창조과학' 같은 게 그렇다. 근본적으로 과학으로 모든 성경이 입증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반대로 성경 안에 들어있는 신비와 불가해를 아예 거세시켜버리려는 철학적인 시도도 꽤나 존재한다. 난 이 책을 펼치면서 그런 부류의 책인 건 아닐까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고, 솔직히 몇 년 전 처음 읽었을 땐 눈에 글자가 잘 안들어오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그 의심을 다 거둬내지 못한 채로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어보고 난 뒤로 이 책이야말로 스스로를 기독교도라고 생각한다면 한번은 꼭 읽어봄직하다 싶어졌다.
이 책은 철학자가 철학적인 관점에서 신앙을 찾아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떠나서 이런 책을 본다는 게 너무 인문학적인 시도 아니냐?" 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고 있으면 저자인 강유원 박사가 무척 깊이있는 신앙의 토대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과 감정과 의지라는 도구를 주셨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나라고 우리를 이끄신다. 예수님은 그 표본이 되셨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열심을 확증하셨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꿈과 열심이 우리에게서 완성되기까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이게 우리가 믿는 기독교라면, 우리는 당연히 각자가 자신의 삶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하여 '이 책'과 같은 '자신만의 신앙고백'을 가져야 마땅한 것이다.
4. 누군가가 내게 왜 기독교를 믿느냐고 물어본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예수의 이야기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난 지금까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거란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렇다. 난 '예수님의 이야기'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 저 먼 옛날 척박한 팔레스타인 땅에 한 아이가 태어나고 평범한 목수로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다가 억울하게 죽고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이 이상한 이야기는 어찌보면 뜬소문 같고 억지로 얼기설기 끼워맞춰진 구전설화나 민담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이 온 우주를 무대로 한 창조자와 피조물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손길을 느끼고 나면, 그저 그 자리에서 무장해제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거다. 이천 년이 지나 제임스웹을 띄워서 우주의 끝을 관찰하려고 하는 현대인에게도 이 이야기는 삶에 의미를 주고 의지를 부여하고 가치를 깨닫게 하고 본질을 알려준다.
그래서 난 여전히 기독교도다.
5. 예수는 스캔들로 태어나 루머와 함께 사라졌다. 처녀가 아이를 가졌으니 아마 로마병정에게 겁탈을 당했거나 사통을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런 일은 가족들이 돌로 쳐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을 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촌 형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며 자신의 모든 인기를 내어주고, 서글프게도 헤롯의 광기로 인한 베들레헴 아이들의 비극적인 살육사건이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로 그려진다.
성경은 희한할 정도로 다 그런 식이다. 예수의 시신을 제자들이 짜고 숨겨버린 다음 부활했노라 헛소문을 퍼뜨린 게 아닐까? 당시 대제사장들도 그 일을 염려하여 돌무덤 앞에 병정들을 세워놓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런 대범한 일을 벌이기에 제자들은 비겁하고 무능하고 의심투성이다. 이들이 이렇게 오합지졸이니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심지어 나중엔 기독교도를 이단으로 여겨 죽이러 다녔던 이가 나도 예수를 만나서 '사도'가 되었노라 말하고 다니다 끝내 저 먼 바다 끝에서 순교한다.
성경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저 의심이 생겼으면 의심을 들고, 허무가 피어오르면 허무를 들고, 좌절과 고통과 실패를 만났으면 그 모든 상처를 몸에 지닌 채로 그저 그대로 나아오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장 28절 말씀]
여기의 '모든' 것은 그저 '모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좋은'것만 모아담고 나쁜 것은 쓸어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못난 것, 나의 부족한 것, 무기력한 것, 피할 수 없었던 고통과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들, 선택한 적이 없으나 가지고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한계와 여건들까지도 이 '모든' 것 안에 들어가 결국 '선'이 된다. 어떻게 이렇게 완성되지 싶은 퀼트처럼, 하나하나는 남을 찌르고 벨 날카로운 유리조각에 불과하지만 장인의 손을 거치면 아름다운 빛의 그림이 되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6. 사실 기독교도인 나도 답답하다.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젠가 하늘문을 여시고 재림하신다고 하시는데, 그냥 그 전에 딱 한 번만, 많이도 말고 딱 한 번만, 하늘 위에다가 '앞으로 5분 줄테니 나 믿을 것 -예수-'라고 쓰시면 끝날 일 아닌가?
그러나 안다. 성경에도 이게 사탄이 예수에게 한 시험이었다. 모두를 놀라게 할 잊지 못할 퍼포먼스를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사탄은 예수를 시험했다. 하지만 예수는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창조과학자들이 찾아 헤매는 노아의 방주조각처럼, 아니면 아더왕 전설이나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진짜 성배가 우리 눈 앞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예수는 이렇게 명령하고 하늘로 올라가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
난 늘 이게 궁금했다. 왜 증거를 안남기고 증인을 남겨두는가? 저 말을 들은 제자들 중에 대체 믿을 놈이 누가 있나? 저 예수의 지상명령을 받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 중에, 그래 바로 다른 사람 아닌 나는 예수님이 보기에 믿을만한 놈인가 싶은 거다. 나도 날 못 믿겠는데 왜 먼저 믿어버리는가? 왜 신이 자신의 명예를 인간에게 맡기는가? 그래서 난 가끔 그렇게 말한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게 아니다. 예수가 못 믿을 나를 믿고 있는 거지."
7. 난 부끄럽게도 전도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예전에 고등부 교사로, 청년부 리더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늘 그렇게 말했다.
"전도대상 제 1순위가 바로 '나'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제발 전도됐으면 좋겠다. 언젠가 내가 예수의 길 위에 서 있다는 게 분명해지면 좋겠다. 그때까지 나의 하나님은 늘 숨어계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다. 숨어계신 듯 보여도 그분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조차 있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 속에, 문득 떠오르는 마음 속에, 가끔 찬란하게 내리는 햇살 안에, 조카들의 맑은 미소에, 시간이 차오르면 불어드는 따사로운 봄바람에 하나님은 늘 계시고 또 다가와 위로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렇게 만약 전도라는 걸 꼭 해야 한다면 내 행복이 서서히 번져나가 자연스레 '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꽃이 피듯이 노을이 지듯이 그냥 내 자리에서 내 삶이 증거가 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세상 사람들이 '신이 있네 없네' 할 때 난 그냥 숨어있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 분의 품이 그러기에 충분히 넉넉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