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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Mar 22. 2024

우린 나란히 걷고 있지만 아직은 만날 수 없어요

미야모토 테루「환상의 빛」

1. 얼마 전 연재가 끝난 나의 소품집에서 친구들 얘길 간간히 하곤 했는데, 아마 그 이야기를 읽거나 기억하시는 분이 극소수일 것 같으니(이게 찾아서 읽어주십사하는 무언의 부탁내지 압박임을 느끼시면 다행인데...) 부담 없이 다시 얘길 꺼내보자면 나 포함 다섯 명의 고등학교 친구들은 희한할 정도로 다 다른 환경에서 군생활을 했다.


다섯 중 셋이 육군으로 갔는데 나는 차출이 되어 경찰서에서 전투경찰로 있었고, 한 명은 후방 신병교육대에서 조교를 했다. 마지막 한 명은 최전방 GOP에서 철책을 지켰다. 남은 둘 중 하나는 공군 헌병이었고, 마지막은 공익근무요원이었다.


우린 당연히 공익은 군대 취급 따윌 해주지 않지만, 공익 나온 녀석은 늘 자신은 지하철 공익이었으며 지하철은 '공익계의 특전사'라고 우긴다. 그리 따지자면 난 간간히 비상이 걸리면 미친듯 계단을 뛰어내려가 앞뒤로 납판이 들어있는 방탄복을 입고 은행강도나 대테러 작전에 투입되는 내용의 훈련을 했었다. 영화에서나 보는 SWAT 복장과 거의 다르지 않았고 K2 들고 시내를 누비면 사람들이 보는 눈도 꽤나 반짝거렸다. 그런데 어딜 감히 공익이 비비려고 드는 건지. (엣헴...)

하지만 지하철 공익 녀석이 겪은 한 가지 사건만큼은 나름 끔찍했노라 인정(?)을 해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군생활을 할 시절엔 아직 지하철에 스크린도어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사 안으로 달려오는 지하철에 몸을 던지곤 했다. 내 친구는 그 시신 수습을 해본 경험이 있다.


"그냥 산산조각나서 흩어져버린다고 생각하면 돼."


그 시절 지하철을 운행하는 기관사 분들 중에는 그 일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분들도 꽤나 많았다. 누군들 안 그럴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제동거리라는 게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미 발견을 한 순간에는 손을 쓸 수 없는 거다. 그 무기력함. 자신의 책임은 아니지만 결국 자신 앞에서 누군가가 산산조각나서 흩어져버리는 순간을 목격해야 했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어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무심코 "차라리 죽으려면 다른데서 죽을 것이지."란 무신경한 말을 내뱉게 되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흩어지는 일을 향해 무기력하게 떠밀려 올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괜히 한숨만 짓게 되는 일이었더랬다.

2. 주인공 유미코는 칠 년 전 남편과 사별했다. 고작 스물 다섯의 일이었다. 둘 사이에 낳은 아들 유이치는 당시 삼 개월 밖에 되지 않았었다. 남편은 철길을 걷다가 전차에 부딪혀 사망했다. 사체는 복원할 수 없을만큼 그 자리에서 흩어져 버렸고, 몇몇 유류품과 이튿날 아침 발견된 엄지발가락의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녀는 그 일이 있은 후 몇년이 지나 재혼을 했고, 지금 살고 있는 쇠락한 어촌 마을로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 재혼 자리도 아내와 사별한 채 혼자 딸을 키우고 있는 남자였다. 이제 유미코의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죽은 남편을 향해 가끔씩 말을 걸고 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남편이 왜 죽었을까?" 이다. 그 누구보다 유미코 자신이 가장 먼저 그런 질문을 던졌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소설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수많은 뾰족한 시선들이 그녀를 할퀴거나 찌르고 가지 않았을까? "대체 여자가 어떻게 했길래 남편이 자살을 해." 이런 책임질 수 없는 가벼운 말들이 그녀의 귀에 닿는 일은 없었을까?

3. 어떤 통계나 조사가 없이 그저 혼자만의 선입견 같은 것이어서 이게 틀렸다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슬픔의 표출방식이야 다 제각각인 게 맞겠으나 극한에 다다르면 딱 하나의 방식만 남을 거라고 믿는다.


'멍함'이다.


그때 감쪽같이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당신이 죽고 나서의 그 며칠간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합니다. 여우한테 홀린 것 같은, 여럿이서 누군가에게 속은 듯한, 그런 멍한 마음속에 흐느끼지도 울부짖지도 못한 채 오직 컴컴한 땅속에 가라앉아 있는 또 하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옆에서 울고 있는 유이치를  내버려둔 채 멍하니 다다미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관리인 부부가 하루 종일 저를 지켜봐 주었습니다. 남편의 뒤를 따라 가스관이라도 물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저는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유이치를 데리고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의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마음에, 비 그친 선로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이 이제 또렷이 비쳤습니다.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중에서


그녀는 남편의 뒤를 쫓아 환상의 선로 위를 걸어나간다. 이제 가끔씩 남편은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기까지 한다. 그녀는 남편을 부르지도 못하고, 붙들지도 못한다. 그저 남편이 돌아볼 때면 한없이 슬퍼져서 꼼짝 못한 채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작아지고 멀어져가는 남편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4. 이 이야기는 유미코의 남편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 알아내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그저 그는 떠났고 우린 영영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유미코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대체 왜 그랬는지, 그렇게 어딜 가고 싶었던 건지, 왜 그런 흩어지는 길로 떠밀려 들어갔는지 그녀는 알 수 없다.


우린 그것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여전히 흘러가는 유미코의 시간과 칠 년 전 갑자기 끝나버린 남편의 시간은 이제 나란히 놓여져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마치 철길 같다.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그 두 시간 위로 남편의 죽음이 아닌 유미코의 삶이 흘러간다. 유미코의 삶이 흘러가는 동안에는 아마 그녀는 영원히 남편이 왜 그런 시간을 마주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곁에서 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계속 바라보며 질문하는 것 말고는 허락되어있는 것이 없다.

물론 아픈 일이다. 사람했던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고 영원히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은. 그 아픔은 가끔 미친 바다처럼 밀려들어와 그녀의 삶에 휘몰아친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대와 나 사이에는 이미 무겁고 단단한 침목이 놓여져 있다. 이건 우리를 이어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일정 간격을 지킨 채 멀어져 있으라고 우릴 묶어두고 있는 족쇄다. 침목이 놓여있는 한 우리는 나란히 있어도 우리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면, 우리의 시간은 철길이 아니게 되고, 이 위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못한 채로 모두 다 전복되어버릴 것이다.


삶이란 이렇게 엄연히 잔혹한 것. 맑고 잔잔해보여도 갑자기 얼굴을 바꿔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는 꿈틀거리는 파도를 속에 품고 있는 바다 같은 것.

5. 이것도 무척이나 개인적인 감상인데다가 이 말을 듣고 "그리 생각하는 게 다 먹는 거랑 연결이 되니 당신 몸뚱아리가 헤비급이 되는 거 아니겠어?"라고 한다 해도 사실 할 말이 없지만, 난 그 나라의 음식과 그 나라의 소설은 묘하게 비슷한 뉘앙스를 갖지 않나 생각하곤 한다.


미국 소설은 "자 고기다. 일단 배 터질 때까지 고기만 먹어라."의 느낌을 받는다. 유럽 쪽 소설은 전반적으로 눅진하고 화려하다 싶다. 한국 소설은? 찬이 많고, 밸런스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뾰족한 게 부족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당장 내 입맛에 가장 편안한 건 한국소설이다. 그러면 일본 소설은? 깔끔하다.'칼맛'이 느껴진다. 대신 포만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이 소설도 역시 배고픔은 남는다.


이 소설을 읽고 난 첫 감상은 '슬픔을 태우고 거르고 또 태우고 걸러 내리면 이런 맑은 청주 같은 이야기가 되는가보다' 였다. 소설집인데 나머지 작품들은 솔직히 분량이나 모든 게 약간씩 아쉽다. 대신 표제작인 이 「환상의 빛」은 진심 향도 맛도 좋다. 마침 찾아보니 영화화가 되어 있었는데, 감독이 내가 너무나 애정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였다. 거의 다 보고 안 본 게 몇 안 남았는데, 아직 이걸 안봤을 줄이야. 이런 게 행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의 삶은 한 쪽에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상을 두고 그 반대 쪽에는 이해 못할 슬픔과 알 수 없는 질문을 둔, 그런 철길 위를 달려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답답하고 막막해서 우리는 질문에 매달리든, 때론 삶을 그만두든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원래 그저 그런 거라고, 우리는 결국 그렇게 계속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잔인하고 무책임한 말이 되는 걸까?


나얼과 성시경이 부른 노래, '잠시라도 우리'의 가사를 쓴 박주연 작사가는 바다 위로 흩어져가는 노을을 보면서 이 대목을 떠올렸다고 한다.


떠나간 모든 것은

시간따라 갔을 뿐

우릴 울리려 떠나간 건 아냐

너도 같을 거야


이 철길의 끝에서 우린 결국 몰랐던 질문들의 답을 알게 되는 날, 깨닫지 못했던 의미들의 진실을 만나게 되는 날이 올 거다. 그때까지 우린 나란히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래, 미안하지만 아직은 만날 수 없으므로 그저 가끔씩 대답없는 너에게 혼잣말 하듯 말이나 건네본다.


대답없는 그대여, 그래도 거기 그대 있음에 나는 이제 가끔 감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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