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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Feb 08. 2024

이만큼의 따뜻함 만으로도

최은영「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1. 아주 오래전 일이다. 여사친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어쩌다가 주제가 '바바리맨'으로 옮겨갔다. 본인도 세 번인가 본 적이 있고, 한 번은 비 오는 날 골목길을 가는데 우산 속으로 강동원이 아니라 벌거벗은 아저씨가 뛰어든 적도 있다고 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했는데, 현실이었다. 그때 난 여성들이 내가 모르는 세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과장됐으려니, 일종의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그저 내가 모르고 눈감은 공간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일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날 이후 더더욱 내가 가진 편견이 강화되었다. 난 남성 작가가 여성 화자를 주인공으로 쓴 작품에 대해, 반대로 여성 작가가 남성 화자를 주인공으로 쓴 작품에 대해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우린 나름 같은 공간을 나눠쓰고 살고 있다 생각하지만, 서로 경험하는 것들이 너무나 다르다. 아무리 생각을 깊게 하고, 취재를 하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고, 또 성별이 아닌 인간본성 본연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해도, 결국 한계가 있을 거란 생각이 굳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난 여성 작가의 작품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내가 이 작품을 다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지 않는다. 그냥 듣고 '아는' 거다. '경험'까지만 와도 나쁘지 않다. 그 너머에 다다랐다고 난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게 작가가 생각한 지향인지 까지는 나로서는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사실 그리 생각하면 모든 작품이 그렇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해'라고 하는 말이 정확하다. 결국 다 타인의 이야기니까.


2. 이런 말을 적어두는 게 나한테 유리할 게 하나 없고 내 부족함을 드러내는 이야기란 걸 알지만 기왕 솔직하기로 했으니까 부디 아량을 부탁하며 이야길 해본다. 난 사실 페미니즘적 뉘앙스가 짙은 이야기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나름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알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그러나 애초에 난 내가 그 이야기 안에 초대를 받지 못하는 존재로 느껴진다. 그러니 반사적으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썩 가져다 쓰고 싶은 비유는 아니지만 삼국지로 예를 들자면 내게 그들은 조조가 아닌 관우의 목을 노리는 손권처럼 느껴진다. 물론 손권에겐 유비도 적이고, 조조도 적이다. 조조는 대놓고 나쁜 놈, 유비는 착한 척 하는 나쁜 놈이었겠지. 그렇지만 관우의 목을 치는 타이밍은 너무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조조의 팔다리 한두개는 더 꺾고 그 다음을 도모했으면 손권에게도 다음이 있었겠으나, 결국 조조 좋은 일만 시켜줬다. 큰 적을 앞두고 작은 적을 늘리는 걸 전략이라고 우기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물론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보이는 적을 썰 뿐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것도 자유다. 대신 나름 가부장적인 권위를 세워보려 애쓴(그러나 결코 성공하지도 못했고, 차라리 요즘은 한풀 꺾여서 모두가 편해진) 아버지와 나름의 전쟁을 벌이며 살아온 내 입장에서는, 나 조차 적군취급하는 이야기를 접하면 그냥 덮고 싶은 게 사실이다. 세상에 볼 책이 한두 권 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 서운한 마음으로 그런 책들을 굳이 찾아볼 필요가 있을까? 피하는 것도 내 자유인 거니까.


3.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 내게는 많이 멀고도 먼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모두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쓰여진,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마나 믿고 볼 수 있는 건 그걸 다 여성 작가가 썼다는 거다.) 남성, 특히 나보다 한 세대나 반 세대 윗 사람들은 (다섯 번째 단편인 '파종'을 빼곤) 모두 가해자다. 하나같이 무능력하고, 무신경하고, 무가치한 존재들이다. 그런 인간들이 없다고는 못하니까 결코 틀린 건 아니지만,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전형적일까 싶을 정도여서 반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 모든 반감을 뚫고 좋았다고 밖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들을 다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에서 걸어나와서 내 마음에 닿는 문장들이, 마음들이 있었다.


짧은 이야기 속의 모두는 하나 같이 완벽하지 않다. 다들 어딘가를 지향하나 이르진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부족함이나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은 채로 길을 가고 있거나, 아니면 이제는 영영 자신이 그 곳에 닿을 수 없게 되어버렸음을 알면서도 그 방향을 향한 마음의 기울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은 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이야기의 모두는 인간의 내면을 한꺼풀씩 파고 들어감으로서 본질에 닿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그들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갖기 쉬운 판단과 감상이 아닌, 한 층 더 아래 고인 지하수 같은 감정들을 끌어올린다.


사실 더 좋았던 건 이런 노력이 그들을 구원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 쓰여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리어 내면의 문제를 깨달았기에 삶의 방향이 뒤바뀌고, 손쉬운 용서를 구할 수 없게 되고, 적당한 타협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늘에 갇힌 것만 같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좌절하지 않는다. 쉽지 않지만 이게 자신의 방향인 것만은 분명하기에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하려고 한다.


4. 개인적으로는 다섯 번째 단편인 '파종'을 읽다가 진짜 오랜만에 책을 붙들고 울 뻔 했다. (가까스로 울진 않았다) 날 한없이 약하게 만드는 단어가 바로 '조카'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울 세 꼬맹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지난 달에 봤고 조만간 또 세뱃돈을 뜯길 예정입니다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셋 다 남친이랑 데이트 간다고 늙은 삼촌은 거들떠도 안보고 휙휙 사라질텐데 내가 그 꼴을 어찌보나 싶다. (제 부모들도 내버려둘텐데 내가 도리어 부들부들거릴 상상을 하면 스스로도 어이없긴 하다.)


가끔 내 마음이 고스란히 들킨 것 같은 문장들과 마주할 때가 있다. 문장 몇 개로 마음 빗장이 이렇게 손쉽게 해체되어서 스스로 이렇게 보안이 허술하면 어떡하나 걱정스럽다.


조카들은 저희 집에 삼촌만 오면 엄마가 평소에 하지 말란 짓을 마음껏 하려 든다. 어찌되었든 엄마가 오빠 앞에서는 화를 덜 낸단다. 난 그게 너무 좋다. 아이가 아이처럼 떼도 쓰고 그래야 한다 생각하고, 그 핑계가 되어주는 게 삼촌노릇이라 믿는다. 삼촌 앞에서 앞으로도 너희는 몇 살이 되든 언제까지나 어른일 필요가 없다. 옹알이하고 떼쓰고 마구 타고 놀 그 시절로 언제든 돌아가도 좋다. 난 언제까지나 그런 그루터기로 너희들 앞에 있고 싶다. 그게 안되는 날이면 훨훨 타올라 그 순간 끝났으면 싶다. 진실한 소원이다.


5.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건 네 번째 단편인 '답신'의 문장이었다.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나는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자격이 내겐 없더라."


우린 늘 '따뜻함'에게 '완벽함'을 요구한다. 이게 다 칸트가 뿌려놓은 못된 습관일지도 모른다. 부족하면, 어긋나면, 코드가 맞지 않으면 따뜻함이 아닌 것인가? 그럼 우리는 언제 따뜻해지고, 언제 사랑을 누리고, 언제 선함에 닿을 것인가?


우리는 늘 따뜻함에게 패시브하우스 같은 철벽단열의 강철대오를 유지해서 눈보라 치는 깊은 겨울 밤에도 웃풍 하나 없이, 팬티 한 장만으로 땀이 날 정도의 열기를 요구하곤 한다. 그게 아니면 따뜻함이 아니라고,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를 외친다. 하지만 웃풍이 없이는 당신의 체온에 내가 감사해야할 이유가 없다. 꽁꽁 얼은 발을 아랫목 이불 속으로 밀어넣으며 서로의 손으로 비벼줘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조그만 찻잔 속 물 하나 끓이지 못하는 체온으로 산다. 하지만 그러기에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다. 많이 부족하기에 깊이깊이 끌어안아도, 오랫동안 놓치 않아도, 서로를 해치지 못한다. 손을 하도 오래 잡고 있어서 땀띠가 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화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 않나.


6. 우리가 가진 부족함을 가감없이 드러내놓은 이야기지만, 그래도 미세하게나마 흐르는 따뜻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이 책의 따뜻함은 윗풍, 웃풍 다 있는 집의 아랫목 같다. 어릴 적 살았던 전주의 오래된 한옥이 그랬다. 마루 너머 안방 문은 창호지 바른 미닫이 문이었는데 겨울이면 늘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리 꼭꼭 닫아도 칼바람은 길을 찾아 안으로 파고들었다.


할아버지는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무거운 솜이불로 아랫목을 덮었다. 할머니는 옛날엔 노인 양반들이 아랫목 차지하고 있으면 자기는 윗목에서 바들바들 떨며 밤을 지샜다 하시면서도 손자 손녀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이불을 들춰 주셨다. 여러겹 겹친 종이에 기름을 수없이 먹인 바닥은 아랫목만 거뭇하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뜨거운데도 배를 깔면 등이 시리고, 뒤집어 등을 데우면 배가 아렸다. 할머니는 사라호 태풍 때 문에 잘못 끼어 관절이 나갔다는 굽은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셨다.

난 그렇게 믿는다. 시린 코를 언 뺨으로 부벼 달래주며, 빨개진 귀를 두 손으로 덮어주며, 호떡 뒤집듯 시시 때때로 서로의 몸을 따뜻한 쪽으로 뒤집어주며, 서로를 밤새 따뜻한 쪽으로 조금씩 밀어낸다면 이만큼의 따뜻함 만으로도 이 차가운 밤을 넉넉히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앞으로 최은영 작가의 이야기는 천천히 다 읽어보게 되지 싶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내가 닿을 수 있는 건 그저 '안다' 이상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점수로 따지면 70점만 맞아도 대박이고, 60점으로 과락만 면해도 다행이다. 살다보면 인생은 원래 그런 모자란 다행과 불안한 다행을 연이어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도록 만들어져있는 징검다리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놓은 걸음마다 감사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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