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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Jan 25. 2024

가만히 머문 채 다녀온, 깊고도 서글픈 순례길

패트릭 브링리「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1. 멋진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다가오더니 벤티 사이즈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까만 텀블러를 당신의 시야 안으로 쓱 들이민다. 당신은 불연듯한 등장에 놀라면서도 동시에 텀블러 입구가 마치 미리 맞춘 것처럼 당신의 손이 쏙 들어갈 수 있을만한 넓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이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는 건지도 의아하다). 노신사는 엷은 미소를 띄며 말한다(당신은 상대가 입술을 뗀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안에는 당신이 오늘 당장 겪을 수 있는 아픈 일들이 모두 담겨 있어요. 지금 여기서 하나를 뽑으면 그 일이 지금 벌어질 거예요. 대신 일주일 뒤에 당신이 겪은 그 아픈 일보다 정확히 두 배 행복한 일로 돌려드리죠. 어때요?"


어떤가? 우린 할 수 있을까?


노신사의 미소는 한없이 선량해보이지만, 과연 우린 이 노신사가 천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의 등 뒤에 박쥐날개가 숨겨져 있고, 저 잘 어울리는 중절모 속에 날카로운 뿔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믿지 않을까?


그런데 우린 더 서글픈 현실을 산다. 노신사가 아닌 냄새나는 노숙자가 다가와서 자꾸 자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라고 바락바락 소릴 질러댄다. 그 어떤 보상도 약속하지 않는다. 당연히 상대를 해주지 않고 피하려고만 하자 그는 자기 멋대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 내 가슴을 향해 던지고 떠나버린다.


모든 아픔은 그렇게 온다. 멋대로 온다. 보상이 없다. 피할 수도 없다.


2. 작가 패트릭 브링리에게는 형인 톰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백 살까지 산다 해도 나는 어딜 가나 톰 브링리의 동생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채 두 살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에게 형은 늘 어른 같은 존재였다. 형은 몸집도 크고 건강한 사람이었고, 수학 영재였다. 그 뿐 아니라 명랑하고, 인내심 많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고, 겸손하고, 주변을 웃음짓게 할 줄도 알았다.


그렇게 크고 완벽했던 형이 갑작스럽게 암에 걸리고 투병을 이어나간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누군가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들 세상이 멈추는 일은 없으리라는 증거들로 넘쳐났다." 이런 세상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을 것이란 사실을 직감한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 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유명한 잡지사의 전도유망했던 직원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기로 한다. 이 책은 그가 인류의 시간이 만든 위대한 흔적의 틈 사이에 숨어있었던 10년간의 기록이다.


3. 작가는 이 세상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미술관 속에 자신의 시간을 던져둔다. 미술관은 그러고보면 참 수많은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다. 고작 한 걸음을 움직였을 뿐인데 내 인생의 몇 분의 일이 흘러가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한 건물 안에 놓여진 시간을 연표처럼 일직선으로 그려도 따라잡기 막막한데, 한 물건 물건이 가지고 있는 시간을 합친 후 그걸 내 인생으로 계량하려고 하면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가만히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다. 끝없이 떠돌고 소용돌이치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헤맬 수 밖에 없는 곳이 바로 미술관이다.


알랭 드 보통은 '영혼의 미술관'에서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고통을 보다 잘 견디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작품(리처드 세라의 <페르난두 페소아>를 말한다)은 우리의 고민을 부인하지도, 기운 내라고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슬픔은 애당초 인생의 계약서에 적혀 있다고 일러준다."


패트릭 브링리는 경비원으로 일하며 수많은 불평을 들어봤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불평이 "맙소사! 여기도 예수 그림이잖아!"였다고 말한다. 실제로 한 구역에만 210명의 예수가 산다니 많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예수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특히 고통을 당하는 예수의 그림을 보며 이런 목소리를 느낀다.


"이것이 현실이다."


예수가 살아있을 때도 그랬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가 지도자가 되면 드디어 로마의 압제라는 엄연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로마 총독의 재판정에 끌려간 예수는 그저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예수가 능력으로 로마군인을 숨에 제압하길 원했던 군중의 바람은 금세 분노로 바뀐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칼과 무기의 나라를 말한 적이 없는데, 군중은 속았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권력을 지키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백성은 호응한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을 고통스런 현실에서 해방시키지 못할 바에는 예수에게 자신들의 모든 고통을 퍼붓기로 작정한다. 예수는 조롱을 받으며 벌거벗겨진채 온갖 수치를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후 사흘만에 부활한 예수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제자 도마에게 말한다. "네가 직접 이 손의 못자국을 보고 네 손을 창에 찔린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이상하다. 부활해서 모든 것이 회복되었을 줄 알았는데 예수의 손과 옆구리에는 온 인류의 비명과 악다구니로 인해 박히고 찔린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다.


슬픔과 고통과 비탄이 왜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심지어 그 효용을 이야기하는 건 차마 할 짓이 아니다. 그저 아무 말없이 못 박힌 손을 내미는 것만이 가장 충분하고 정확하다. 이건 '나도 아팠다'가 아니다. 내 아픔과 네 아픔을 비교해서 어떤 우위로 널 윽박지르거나 안심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아픔을 너의 아픔 앞에, 그것도 네 아픔이 방해되지 않는 자리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필요하면 내 아픈 손의 체온을 가져가도 좋다. 내 아픈 옆구리의 상처 속에 숨어도 좋다. 그렇게 가만히 있음으로 기다리며 이해한다. 그러면 알아서 아픔이 공명하고, 알아서 아픔이 제 소리를 찾고, 알아서 아픔이 길을 만든다. 그 자신이 신이자 신의 아들인 사람 조차조도 누군가의 아픔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영원히 낫지 않는 상처를 몸에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너의 엄연한 현실과 내 피하지 않은 고통이 이어진 그 길 위에서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4. 세상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다. 사실 우리가 사는 모양의 원조가 미국이다. 경비원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뒤따라붙은 단어가 '갑질' 아닌가. 그 곳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자신도 '신발바닥에 붙은 껌 같은 취급'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어디에나 속물은 있다.


내 아버지의 바로 아랫동생이신 작은 아버지는 평생을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교직에 계셨다. 해당 학교에서 대입 상담교사오래 하셔서 관련 인터뷰 기사도 몇 번 나왔던 걸로 안다. 그런데 은퇴 후 잠깐 댁 근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도우는 도우미 역할 같은 걸 하셨나본데, 선생들이 이런저런 갑질을 하더라고 돌려 말하시며 씁쓸하게 웃으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마 스스로도 평생을 선생으로 사셨으니 차마 다른 선생 욕을 할 수가 없어서 참고 참으셨던 게 그 정도리라 생각한다.


우리도 이 책을 읽다보면 당연히 그런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어떤 예술 작품이 상처 받은 영혼을 낫게 하는 이야기. 이 작품은 어떤 위로를 줬고, 이 작품에서는 어떤 감명을 받고, 이 작품은 어떤 쓸모가 있었다는 이야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부는 아니다.


패트릭 브링리는 일하는 첫날 사수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너와 나, 우리는 거장들과 함께 일하는 거야." 책을 덮고 나면 알게 된다. 저자를 다시 삶의 흐름 속으로 나설 수 있도록 회복시키고 격려한 모든 일들은 예술작품을 만들었던 거장들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일하는 경비원들의 협업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만난 예술작품 뿐 아니라, 그 곳의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그는 결코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거다.


애초에 우리는 기대조차 하지 않지만 이 책 안에는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꿋꿋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있다. 그들이 어떤 사연을 제복 아래에 숨겨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도 작품을 만들고, 때론 누군가를 가르치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누군가의 선한 이웃으로 살아간다.


과연 우린 이 책을 읽기 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패트릭 브링리를 봤다면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 기껏해야 순간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도 동시에 우월감이나 자기만족감을 충족시키려 들진 않았을까? 그에게 작품에 대해 묻긴 했을까? 그가 작품 설명을 해주면 그 내용을 귀기울여 들었을까?


마침 오늘 출근길에 버스기사 아저씨가 라디오에서 흐르는 김광석 노랠 따라 흥얼거리시는데 의외로 음감이며 리듬감이 좋아 듣기 나쁘지 않았다. 그때 문득 저 아저씨의 운전석 너머의 삶이 궁금해졌다.


우린 누구나 껍데기 속에 숨겨진 진짜 삶을 가진 사람이다. 제복을 걸쳐입은 허수아비가 아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는다. 남을 볼 때도, 나 자신을 볼 때도 그저 겉만 보느라 진짜를 놓친다.


5. 시간이 흐르고 그는 천천히 미술관을 나설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에게 도움을 준 두 명의 예술가가 있는데 한 명은 미켈란젤로이고, 한 명은 로레타 패트웨이 였다.


미켈란젤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미술사 최고의 거장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거장이라 여겨 본 적이 없다. 매번 원점에 서서 매번 최선의 노력을 할 뿐이었다. 때론 실수도 한다. 그 때마다 자괴감에 몸부림치기도 한다. 미켈란젤로는 말한다. "수치심과 슬픔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책에는 미켈란젤로가 다 완성하지 못했던 피에타 상의 스케치가 실려 있다. 그 미켈란젤로 마저도 끝까지 치열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슬픔만이 인생에 주어진 기본 값이 아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나아갈 것을 종용한다.


미켈란젤로와 비슷한 역할로 소개되는 로레타 패트웨이는 퀼트 작가로 평생동안 퀼트만 만들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퀼트를 만들지만 바느질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서는 옥수수 껍질로 만든 매트리스를 덮을 퀼트가 필요했다. 그게 시작이다.


어떤 대의를 가지고, 어떤 위대한 목적을 지향해야만 시작할 수 있는 게 인생이 아니다. 패트릭 브링리는 말한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 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심보선 시인의 시 한 구절도 떠오른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각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심보선 시 '좋은 일들' 중에서]


6. 이제 그는 더이상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아니다. 그는 어엿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형을 잃고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버린 채 도망치듯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숨어들었던 그때, 그가 지금의 일들을 계획하고 있었을까?


내가 스티븐 커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처음 읽었을 때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치고 요약노트를 만들고, 그 두꺼운 책을 몇번이고 읽었는지. 그래놓고도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는 습관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 매일 버둥거린다. 물론 이게 다 스티븐 커비의 탓이란 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단 얘기다(이러면 또 실행력이 중요하다는 주제의 책을 추천받는다. 그런 시절이다).


사실 책에서 성공의 비법을 찾건 꼭 요즘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우스갯소리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라고 1000년 전 수도사가 기도문 구석에 낙서를 해뒀다고 하는데 알고보면 1500년 전에도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를 죽간에 적어 돌려읽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구도 일부러 아프려는 사람은 없다. 성공해야 하고, 재테크에 열정을 쏟아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외모를 가꿔야 하고, 자신감 있고 진취적인 태도를 길러야 하고, 남들과는 다른 방식의 사고를 하고, 일류 이상의 초특급이 되는 일도 꽤나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성공들로 자신의 성을 쌓으면 어떤 아픔에도 침범당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 건 내겐 너무 이상하게만 들린다. 성경에는 눈 앞에 가난한 사람을 두고도 창고에 재물을 가득 쌓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는 질문한다. "네가 오늘 저녁에 죽기로 되어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


죽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영원히 아픔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니, 아픔의 화살을 안 맞아 이 모든 일들을 평생 모른 채 사는 게 정말 운이 좋은 것일까? 그게 진짜 행운이 맞기는 한 걸까?


그래서 난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이 이야기는 아픔으로 시작해서 삶으로 끝난다. 삶은 이어질테고 또 다른 아픔이 기다리고 있을테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도망친 곳에서도 삶은 그 길을 찾아 이어진다. 한 번은, 혹은 여러번이라도, 쉬어가도 괜찮다.


7. 언젠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보고 싶어졌다. 아마도 나처럼 무딘 사람이 그 안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추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매일 출근하듯 그 곳에 가야만 할 거 같다. 그러려면 이동에 체류 경비며 이것저것 꽤나 까마득한 이야기다.


게다가 난 극심한 영어 울렁증이라 외국 사람 앞에서는 바짝 얼어버린다. 또 눈 앞에 '당기시오' '미시오'도 매번 헷갈리는 지경이다(온, 오프 알아먹는게 기특하지). 동행이 있어서 영어를 해주면 그거 따라가긴 할텐데 그런 동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살면서 어떤 책 한 권 때문에 어딘가를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생각해보니 이번에 처음 한 것 같다.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읽어도 성지순례 같은 건 꿈도 꿔 본 적이 없으면서 이 책은 그 곳에 가서 하나하나 나온 작품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앞에 서면 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혹여 나의 아픔도 어디론가 뻗어나가 작은 오솔길이 되는 걸 느끼게 될까?


앞으로 한동안 누군가에게 책 선물할 일이 생기면 이 책일 것만 같다. 지금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인생은 길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주 평범한 미래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늘 그 다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다음을 향해 발을 내딛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꼭 오늘일 필요는 없다.


지금은 넘어지고 무너져서 도저히 움직일 상상조차 못할 수 있다. 그러면 그대로 잠시 쉬어가도록 하자. 괜찮다. 우리 곁을 흘러가는 시간에 마음을 맡겨둔 채 천천히 숨 고르고 있다보면 언젠가 다시 발 내딛을 힘을 되찾을 날이 올 거다. 오늘, 내일, 아니면 일주일, 이번 달, 올 해... 그 쉼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그게 당신을 다시 살려내고 있다면 그건 결코 그저 흩어지는 시간이 아니다. 괜찮다. 정말 괜찮다. 오늘은 그렇게 마음놓고 푹 쉬기로 하자. 커피 한 잔 내리고, 초콜릿 한 조각 옆에 두고, 좋은 음악을 골라 들으며. 그렇게 잠깐 숨어 있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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