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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Jan 18. 2024

소설과 시 사이, 머묾과 떠남 사이

한강「흰」

1.  한강 작가의 소설을 2016년에 처음 읽었다. 그때 난 무언가를 쓰고 싶어서 도리어 읽는 일을 힘들어했다. 가슴에 내린 활자들이 천천히 스며들어 지하수가 되고 그게 어딘가에서 다시 상처를 타고올라 샘이 되거나 우물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한 줌의 글자조각을 찾아 메마른 땅을 무작정 곡괭이질하던 시절이었다. "읽을 새가 어디있어. 그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써야지."


소설은 '희랍어 시간'이었다. 채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책을 읽는데 한 달을 다 썼으니 그때 내 쓰기에 대한 강박은 끝없이 내리쬐는 뙤약볕을 닮아있었다. 땅이 메말라서 갈라지고 갈라지다보면 언젠가는 무엇이라도 샘솟겠지...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 중 가장 치열했고 가장 어리석었던 시절이었다.


어렵사리 희랍어 시간을 다 읽고 만난 작품이 '흰'이었다. 그때의 난 이런 메모를 남겼다. "2016년 7월 23일. 열대야니까 책을 봐야지. 좋다. 정말 좋다."


너무 짧은 메모라 그때 내가 무엇이 좋아서 좋다고 한 건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내용 자체가 눈에 잘 들어왔을까? 글자 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권'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에도 불구하고 시간투자를 얼마 하지 않은 게 좋았을까? 아니면 그냥 쓰기에 대한 강박을 잠깐이라도 내려놓았던 게 좋았을까?내가 만든 뙤약볕에 내가 제일 먼저 타들어가던 시절이었으니.


이제 뭔가를 쓰진 않고 있지만, 여전히 쓰기에 대한 강박은 묘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쓰기에 대한 강박이 읽기로 바뀐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새해가 보름 조금 넘어가는데 그 사이 11권의 책을 읽었으니 속도가 나쁘지 않다. 이대로면 올해 100권은 넉넉하고 잘하면 평생 처음 200권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7년여만에 건기가 우기로 바뀌어 땅이 물기로 질퍽해진 지금 다시 만난 '흰'은 여전히 좋았다. 이번에는 나중을 위해 조금 길게 기록을 남겨보자.


2. 확인 할 수 있는 정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소설의 화자인 '나'에게는 사실 언니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만난 일은 없다. 달떡처럼 희고 예뻤던 언니는 태어나자마자 두 시간만에 숨을 거뒀고 스물세 살의 엄마는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서 울지도 못한채 모로 누워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이듬해 어머니는 두번째로 사내아기를 잃었다. '나'는 알고 있다, 그 일들이 없었다면 두 번째 조산으로부터 삼 년 후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을.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 삶을 사는 것일까? 언니의 삶을 사는 것일까? ''는 언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언니의 부재가 나의 존재 근거다. 서글프다. 어쩌면 나에게 이런 감각을 안겨준 어머니는 얼마나 부주의한 인물인가. 그러나 그녀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테다. 핏덩어리를 잃은 어미의 상처는 벌어진 채로 영영 닫히지 않는다. 슬픔은 마치 위로 뿌려진 각진 소금처럼 파고든다.


나는 지금 낯선 도시에 와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된 도시. 백지처럼 하얀 폐허가 되어버려서 살아남은 낡은 석벽 위로 선명한 새것이 쌓인 무늬가 남아버린 도시. 도시가 떠난 언니 위에 삶을 쌓아올린 '나'를 닮아서일까? 나는 자꾸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른다. 사실 기억이 아니다. 들은 이야기다. 그 아픔은 그녀에겐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새겨져 있다.


동생의 결혼을 맞아 낯선 도시에서 돌아온 나는 형의 부재 위에 삶을 쌓아올린 동생과 함께 죽은 어머니에게 무명소복을 태워 바친다. 그리고 나는 백지에 힘껏 누군가를 향한 작별의 말을 눌러쓴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3. 책을 보고 있는 내내 그런 기분이 들었다. 페이지가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천천히 글자들이 바람에 일어날 것만 같다. 자음과 모음들이 하나씩 재처럼 종이에서 떨어져나와 허공으로 하얗게 흩어지는 환상을 본다. 그렇게 모두 사라지고 하얀 종이만 남을 것 같다.


한 단락 한 단락이 시 같은데, 전체적으로는 소설이다. 그것마저도 소설이 천천히 시로 휘발되다 남은 중간에 어렵사리 붙들어놓은 언어들인 것만 같다. 이것도 결국 모두 떠날 것 같다.


그렇게 모든 것이 흑에서 백을 향해, 삶에서 죽음을 향해 일방적으로 흘러갈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다. 캄캄한 삶이 하얀 입김이 되어 허공 속에 흩어지듯이.

4. 그러나 모든 것을 단지 허무로 끝낼 수는 없다. 이건 억지로 내가 틈을 기워 메우기 위해 도약하는 게 아니다. 난 이 자리에서 흰 세상으로 떠난 이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느낀다. 우린 떠난 이들이 살아갔을 자리를 강탈하여 태어나지 않았다. 떠난 이들도 억울한 마음에 우리의 삶을 약탈해서 되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까만 언어의 세상에, 그들은 하얀 종이의 세상에, 각각 머묾과 떠남이 되어 '있을' 뿐이다. 우린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서서 한 권의 책이 그러하듯이 한 폭의 수묵화가 또 그러하듯이 부딪히듯 뒤섞이고 물러나듯 서로 머물며 이야기와 그림이 되어간다. 삶이 무작정 죽음으로 흘러가려 할 때 죽음은 자신이 아는 유일한 언어로 우리에게 여기 머물 자격을 부여한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살아가라는 그 말은 아무리 다시 읽어도 '나'의 입술을 통해 먼 길을 건너 온 언니가 내 귀에 들려주는 말 처럼 느껴졌다. 나의 작별이 아닌 언니의 작별이다. 그들은 하얀 언어로 우리의 까만 귓가에 속삭이며, 하얀 눈을 뿌려 우리의 입김을 돌려주며 까만 체온으로 서로를 끌어안으라 격려한다. 너는 그 곳에 나는 이 곳에 지금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자리에 있자고 한다.


5. 워낙 여백이 많은 작품이라 다시 7년 쯤의 시간이 지나 다시 읽으면 그땐 또 어떤 하얀 마음이 착상될까? 꼭 다시 읽게 미리 휴대폰 알람이라도 맞춰둬야 할까? 그런데 과연 내게 앞으로 다시 7년이라는 시간이 허락되긴 할까? 혹여 아니라면 나도 내 소중한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미리 말해둘까.


"그대, 괜찮아요. 부디 웃으며 살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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