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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 보기 May 31. 2024

수술대에 누워 생각했다 "저 아이 가질 수 있죠?"

자궁근종을 발견하게 된 건 2023년(지난해) 겨울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였다. 직업상 외부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어느 날부터인지 어지럽고 심장이 쿵쾅 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느정도였냐하면 미팅을 가던 중에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날이 허다했다. 잠시 쉬면 괜찮았지만, 움직이기 시작하면 같은 증상이 반복됐다. 마침 그때 회사에 여러 문제들이 있는 상황이라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구나'라고만 여겼다.


그러다가 해가 바뀌기 전에 직장인 건강검진을 받게 됐다. 내가 건강검진을 받은 곳은 동네에 나름 규모 있는 산부인과였는데, 검사 결과 빈혈 수치는 6.4g/dL로 굉장히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정상수치는 12g/dL로 알고 있다)  원장님은 빨리 수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다음날 남편과 짧은 여행을 잡아둔 상태였다. 숙소 예약 취소기간도 끝이 나서 취소할 수도 없었다. 원장님은 여행을 가는 지역에 병원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안 가는 게 좋겠다고 여행 취소를 권했다. 결국 손해를 보고 여행은 취소됐고, 며칠의 텀을 두고 수혈과 철분주사를 맞았다. 수치는 8g/dL로 조금 올라왔다.

조금 안정을 찾고 초음파 검사를 했다. 자궁근종이 너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다고 했다. 원장님은 "이 정도면 자궁을 들어내는 게 낫겠다"고 했다. 진료실을 나오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됐다.


"일만 하고 살아서 벌 받는 건가"  


조금 더 상급병원을 가기로 했다. (아마 진료예약 취소 환자가 있었는지) 원하는 병원의 교수님 진료 일정이 기적적으로 2주 뒤 예약이 가능했다. 그렇게 2024년 1월 첫째 주에 다시 검사를 받게 됐다.


앞선 글에서도 기록했지만, 검사 결과를 본 교수님 얼굴이 굳어졌다. 교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어서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로 "근종이 정말 너무 많다"고 하셨다. 보통의 경우 이 정도는 자궁을 들어내야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그런데 제가 아직 아이를 갖고 싶어요. 방법이 없나요?"  

"복강경으로는 할 수 없는 정도예요. 수술을 하려면 개복으로 진행해야 해요."

"할게요."

"그 사이에 생리를 하면 빈혈이 더 심해질 수 있으니, 호르몬 주사를 맞읍시다"

"네. 오늘 맞고 갈게요."


첫 진료날 1차 호르몬 주사를, 한 달의 텀을 두고 2차 주사를 맞았다. 호르몬 주사는 배의 지방에 맞았는데, 맞고 나서 여러 갱년기 증상에 시달렸다. 나중에 갱년기가 오면 이렇게 힘들겠구나 했다.


3월 둘째 주에 수술대에 올랐다. (전공의 파업이 한창이라 연일 TV에서는 수술이 미뤄진다는 이야기들이 보도됐다. 수술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수술이 미뤄질까 봐 겁이 났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수술실에는 직접 걸어 들어갔다. 수술대 위에도 직접 누웠다. 팔을 고정된 혈압계에 끼우고 나니 수술방 선생님들이 바쁘게 소통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이 들어와 인사를 하셨다.

"잘 부탁드려요. 교수님"

"네. 최선을 다할게요."


여러 주의사항을 듣고 마취에 들어갔다. 누군가 깨우는 소리가 한참 들려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들은 말은 "원래 이렇게 마취에서 잘 안 깨세요?"라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어쨌든 정신을 차렸으니 침대에 누워 병실로 올라갔다. 소변줄과 피주머니라고 불리는 배액관이 연결돼 있었고, 혹시 모르는 긴급 수혈에 대비해 수혈용 굵은 바늘이 팔에 하나 더 꽂혀 있었다. 병실에 올라와서는 개복수술을 한 터라 배에 모래주머니(?)를 올렸다. (모래주머니는 다음날 아침 뺐던 것 같은데 뺄 때도 너무 아파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있다.)  

난관은 또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술 후 한두 시간 정도 깊게 호흡을 하면 산소포화도가 정상으로 올라오는데, 나는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잠이 쏟아져 눈이 감기는데 계속 깊게 호흡을 해야 한다고 간호사들과 남편이 자꾸 깨웠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겨우 산소포화도가 정상이 되었다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 저녁 회진을 온 교수님께서 수술은 잘 되었다고, 근종 25개를 제거했다고 설명해 주셨다. 가장 큰 게 11cm부터 1cm도 안 되는 작은 것들까지 정말 많았다고.

수술 후 다음날부터 회복 단계로 들어갔다. 빈혈수치와 염증수치를 검사하고 항생제를 맞고 추가적으로 수혈을 받았다. 조금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병실 앞을 계속 걸었다. 열을 내리고,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걷는 게 최고였다.

그렇게 입원한 지 8일이 지나고 검사결과 이제 퇴원해도 된다는 교수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어찌나 기뻤는지 박수를 쳤다.


그렇게 무사히 수술의 여정은 끝이 났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남편이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이제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되겠구나."



에필로그.

수술을 한 병원에서 첫 진료를 하던 날 대기실에 내 또래의 또는 나보다 어린 여성들도 굉장히 많았던 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서 많은 환자들이 진료실을 들어갔다오면 굳은 얼굴로 앉아있거나, 한숨을 쉬다 일어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나도 첫 진료를 받은 날 대기실 의자에서 한참 울다 일어났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는데"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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