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 도시 이야기 #3 (또 와)보라카이!

방콕-치앙마이.. 그리고 보라카이, 다시 청정한 곳으로의 몸부림을 치는

by 달의 노래
여보, 2층 출국장 1번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남편은 공항에 마중 나올 때면 늘 이런다.

나도 남들처럼 도착장 문이 열리면 여기! 하며 손 흔들며 반갑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누군가가 되고 싶은데 주차요금이 아까워서인지 남편은 늘 2층에서 깜빡이를 켜며 기다리고 있다.

마중 나온 지니 남편과 부끄럽게 인사를 하고 나는 서둘러 다시 2층으로 올라간다.


여보오~ 재미있었어?

아, 몰라! 당신은 왜 맨날 여기서 기다리노?


혼자 잘 놀다 와선 괜히 심술이다. 왜 심술이 났는지는 구질구질해서 말하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탁기를 돌리고 밥을 먹고 여행 가방을 푸는 척하며 다시 짐을 싼다.


여보, 내일 우리 몇 시 비행기지?


보라카이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부산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칼리보 공항에 도착하니 현지 시각으로 밤 12시가 좀 넘은 시각이다.

칼리보 공항에서 보라카이에 들어가기까지는 약 세 시간쯤 걸린다. 남편과 나는 칼리보 공항에서 약 2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작고 소박한 호텔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늦은 밤 체크인이지만 작은 호텔의 직원은 아주 친절했다. 누구는 바퀴벌레를 봤다던데, 이 자연스러운 동네에 바퀴벌레가 없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생각하며 아주 푹 잤다. 자면 눈에 안 보이는 거다.

저렴한 가격에 고퀄리티의 수면을 하고 조식까지 가져다 주니 이 숙소 참 마음에 든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예약해 둔 Southwest 버스를 타러 칼리보 공항으로 다시 갔다. 버스를 타고 까티클란 항구까지 가서 다시 보트를 타고 보라카이에 들어간 다음 툭툭을 타고 숙소에 가는 여정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예약한 시간에 공항으로 갔더니 버스는 아침 비행기로 도착하는 다른 승객들이 수속을 마치고 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나..

오늘은 칼리보 최대의 축제가 있는 날이라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기다리다 축제 때문에 길에서 옴짝달싹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

What? We gotta wait for one or maybe two hours? 뭐? 한 시간 반? 어쩌면 두 시간이라고?

Then what the hell is booking time for? 그럼 예약시간은 왜 있는 것이냐!

결국 사우스웨스트 버스 대신 사우스웨스트 자가용 택시를 타고 까티클란 항까지 가기로 했다.

당연히 추가 요금도 내고 성질도 냈다.

가만.. 이거 혹시 마케팅 아냐?


들어오기도 나가기도 까다로운 보라카이를 세 번이나 온 까닭은 아무래도 이 노을 때문이지 싶다.

오렌지빛 노을이 바다 하늘을 물들일 때면 설명할 방법도 없이 착해지고 평온해지니 말이다.

굳이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착해지고 평온해지고 싶은가 물어본다면 풍경이든 감정이든 그저 beyond expression 일밖에.

세일링 보트의 돛대를 잡은 사공이 잔잔히 일렁이는 붉은 태양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아, 이 아름다운 함몰의 시각을 잊지 못해 우리가 여기 또 왔구나..'싶다.


더 이상 낯설지도 않은 이국에서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일은 딱히 없다.

그저 우리 부부는 돈으로 마음의 평온을 며칠이라도 사고 싶었다고나 할까.

지난 한 해 남편의 시간은 뭐든 마음대로 되는 것 없는 꽤 지친 날들이었다.

그래, 까짓.. 단 5일이라도 우리 좀 느긋해져 보자.


당신은 나만 믿어!

이거슨.. 쉰 둘 마누라가 동갑내기 남편에게 하는 말이다.

도대체 뭘 믿으란 건지 나도 알 수 없다.

인생 각자도생인데 말이다.

허언일지언정 남편의 걱정을 좀 덜어주고 싶었다.

무튼 세상일에 지친 남편과 겨울이면 두개골이 시린 나는 보라카이가 보고 싶었다.


남편과 나는 걷기를 좋아하고, 바다든 풀장에서든 천천히 수영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리고 커피를 좋아한다.

이 세 개의 연결된 문장만을 읽으면 이 부부 참 금슬도 좋겠구나 싶겠다.

우리 부부의 23년을 3인칭 시점에서 보자면 이렇다.

여자가 남자와 같이 산 지는 23년이 되었고, 그 세월 동안 숱하게 싸웠고, 숱하게 서운했다.
여자는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많은 맏며느리의 역할이, 그 인생이 참 버거웠다.
신혼 1년 차에 시아버지는 뇌졸증으로 쓰러지셨고 1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손가락 하나만 움직일 수 있는 전신마비 상태로 지내셨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좋으신 분이어도 시댁은 늘 불편하고 무겁고 어두워 힘들었다.
자유분방한 여자에게 '시댁과 며느리'라는 묘한 세트는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혀 빼 지지 않는 돌덩이 같은 것이다.
운 좋으면 별 통증 없이 넘어가지만, 운 나쁘면 담석 같은 무시무시한 통증을 만드는 것 말이다.
무튼 여자에겐 간헐적 통증이 왔고 그때마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서운하고 무심하고 세상천지 제일 얄미운 존재였으니 23년의 세월은 쓸개에 박힌 담석을 깨부수는 석공의 시간이랄밖에.
다행히 남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본가의 장남', '시어머니의 아들'보다 '여자의 남자'가 되어갔고, 여자는 남자의 충성을 믿고 맏며느리 역할을 스스로 찾아서 하기에 이른다.
어찌 보면 이것은 본가의 장남이자 시어머니의 아들인 이 남자의 큰 그림일지도 모른다.
여자는 늘 헛똑똑이다. 쳇.


걷기와 수영과 커피 즐기기.. 보라카이에서 딱 이 세가지만 하며 지냈다.

숙소에서 대충 아침을 먹거나 안 먹거나 한 후 걷기엔 좀 멀다 싶은 화이트비치까지 걷기.

화이트비치에서 점심을 먹거나 안 먹거나 하며 커피를 마시고, 수영을 하고, 노을을 보고, 저녁을 먹고 산미구엘을 마시며 하염없이 오렌지빛 저녁 바다 하늘을 본 후 다시 숙소로 돌아오기.

숙소에서 고양이와 장난치며 놀다 풀장 마감시간까지 수영하기.


나는 좋았다. 이런 단순한 시간 속 자연과의 어울림 말이다.

남편에게도 이 단순한 시간이 그의 머릿속 주름들을 조금이나마 반질하게 해주는 시간이었길 바란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을 보낸 후 떠나오는 우리에게 보라카이가 또 말을 건다.

또 와 보라카이~카이~카이~!


칼리보 축제 준비 중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