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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길에서 줍다

too hot to breathe, so stuffy here!

by 달의 노래

1. 런던에서

It's too hot to breathe.
So stuffy here!


2012년 여름, 중3이던 딸과 보름간 서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다.

당시 런던 올림픽으로 세상이 한창 들썩일 때 수미와 나는 운 좋게 핫플레이스 런던에 있었다.

1995년 런던 여행 시 히드로 공항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딱히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해리포터'의 광팬인 따님께서 꼭 런던에 가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일정에 넣었다.


20년 전 영국의 입국심사는 싱글인 동양여성에겐 너무도 까다로웠다.

당시엔 불법취업을 의심해서인지 배낭에 있는 짐들을 모두 꺼내라고 하는 바람에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2012의 런던은 확연히 달랐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덕분인지 입국심사는 간편했고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했다. 거리도 20년 전보다 훨씬 깨끗했다.


나는 히드로 공항에서 딸에게 물었다.
"수미야, 여기서 어떻게 호텔까지 가야 하지?"
그간의 여행 이력이 있어서인지 공항을 쭉 스캔하더니 자신 있게 대답하는 딸,
"모르겠는데?"
기내에서 <Just Go> 읽는 것 같더니 베개로 사용했나.. 이 지지배..


"먼저 옥토퍼스 카드를 사야 해. 그리고 글로체스터 역까지 가면 되거든. 자, 봐.."
미리 프린트해 온 호텔 주변 지역의 지도를 꺼내 들고 딸에게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인지시켜준다.
수미는 정거장의 개수를 센다.
기특하게도 무거운 배낭과 큰 캐리어는 자기가 든단다.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도 키 크고 덩치 큰 서양인들한테 주눅 들지 않고 나를 감싸 안는다.
마치 '우리 엄마거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덩치에서 밀리지 않는 내 딸, 역시 무기농유농약으로 쑥쑥 키우길 잘했어..

글로체스터 역에서 내려 300미터쯤 떨어진 호텔 앰배서더를 찾아가는 길..
"그래, 이것이 바로 런던이지!"
하얀 페인트 칠이 된 우아한 건물들이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환대해주는 느낌이 좋다.
수미는 지도를 보며 앰버서더 호텔을 찾느라 내 앞에서 성큼성큼 걸었다. 저 늠름한 등빨!
드디어 앰버서더 호텔을 찾았다. 그런데.. 이건 뭐지?
What on earth is this?

호텔이 코딱지만 하다.
아냐, 런던 건물은 밖에서 보는 거랑은 달라.. 하며 들어가니 더 코딱지만 하다.
이러언..마 돈나 열 받네.
런던올림픽 기간이라 호텔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는데 운 좋게 싼 값에 별 땄다 했더니 별.. 아이네?
프런트 아줌마(도저히 호텔리어라 할 수 없는 저스트 아줌마 포스)가 환영한다며 간단히 여권기록을 하더니 키를 준다.

"You go up to the top floor.
Luckily, you have three beds in your room."

모녀 둘이 자는데 베드 세 개가 뭔 필요 있나.. 전망이 좋아야지.. 하고 올라갔는데 이거슨..여름날 친햇볕 하라는 배려의 다락방이 아닌가!
지금 장난해?
Are you kidding me?

들어가자마자 숨이 턱! 하니 막힌다. 다락방엔 달랑 창문 하나, 서향인지 저녁인데도 햇볕이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쏟아진다.

"에어컨 켜면 곧 시원해질 거야.."
갑자기 말이 없어진 수미님의 눈치를 보며 "들리구로" 혼잣말을 한다.
아, 리모컨을 찾았다. 파워를 눌렀다.
어딘가 구석에서 '덜덜덜' 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나라에서 5만 원 이상 사면 사은품으로 주는 긴 막대 모양의 선풍기가 돌아간다.

아니, 니가 왜 거기 있냐?

3성급 호텔이라는데 에어컨은커녕 냉장고가 없다는 사실에 우리 모녀는 실성 직전까지 갔다.
실신 아니고 실성 말이다.
입에 거품 물고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

"Yes, may I help you?"
"Hello, this is the Korean woman who just got in the room."
"Yes, ma'am?"
"It's too hot to breathe. So stuffy here. I want to change the room into another one with an air conditioner."

너무 더워 내는 숨 몬쉰다. 답답해 죽것다 고마. 에어컨 있는 방으로 당장 바까조~라고 했더니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을 한다.

"아일 기브 유우 투 판~즈~"
"Sorry?"
(도대체 뭘 주겠다는 거야?)
"아일 기브 유우 투 판~즈~"
"I'm sorry?"
"아일 기브 유우 투 판~즈~"
라면서 Wait 하란다.

'그래, 올라오면 제대로 따져야지..'
드디어 올라 온 그녀의 손엔 구석탱이의 막대 선풍기와 같은 넘 두 대가 들려 있다.
투 판~즈.. 가 two fans 였던 것이다. 영국식 특유의 액센트라 챌린지가 많아 촉각 곤두세우며 주의 깊게 듣는다고 들었는데 투 판~즈가 이거였다니..
무튼, 투 판즈고 쓰리 판즈고 필요 없고 에어컨 있는 방으로 바꿔 달라고 하니
"Sorry, we have no air conditioners in all rooms." 란다.
그럼 다락방 말고 다른 방으로 바꿔 달라고 하니 모든 방이 다 부킹 되었단다.
그러고 보니 좁은 로비에 프레스 패찰을 건 기자들이 많이 보였다.
프런트 아줌마는 친절하게 창문을 시원하게 여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는(우리가 연 방향과 달랐다) 밤 되면 시원해질 거니 걱정하지 마라며 나갔다.


창 밖의 교회 종탑에서 아홉 번의 종이 울렸다.
밖은 여전히 환하지만 여긴 밤이고, 수미와 나는 피곤했고 일단 쓰러져 자기로 했다.
쓰리 판즈를 켜 둔 채..
자다가 우리가 찾은 건 담요였다.
깊어 가는 런던의 여름밤은 선득했다.


*이 호텔 다락방에서 4일을 지냈다. 갈수록 정이 가는 방이었다. 특히 여분의 침대 하나는 아주 유용한 공간이었다. 수미와 나는 쓰리 판즈 안 켜고 긴팔 입고 잘 지냈다. 다락방 창문에서 봤던 노을과 교회 종탑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too hot to breathe : 너무 더워 숨 쉴 수가 없는 (too ~to 부정사 ^^)
stuffy: 답답한, 숨 막히는
What on earth is this? : 이건 도대체 뭐지?
Are you kidding me?: 지금 장난해?

아, 당시 중3 수미가 어딜 가나 애용했던 영어 표현=> Could you tell me the wifi password?



2. 세부에서


Tomorrow is too far away. vs. Tomorrow is a day away.

2014년 겨울, 가족과 함께 필리핀 세부로 여행을 갔다.

우리는 Plantation Bay라는, 세부에서 꽤 깊숙이 위치한 리조트에서 지냈다. 리조트 음식이 지겨울 땐 택시를 타고 20분쯤 시내로 나가야 했다.
어느 저녁, 우리는 시내에 있는 'Golden Mango Grill'이라는 꽤 유명한 레스토랑을 찾아 나섰다.
맛있게 저녁식사를 한 후 택시 대신 지역 주민들이 모는 뚝뚝이를 타고 리조트로 돌아 가려고 했으나 한 덩치, 한 기럭지 하는 우리 가족들이 다 타기는 무리였다. 할 수 없이 뚝뚝이에서 내려 '세이브 몰' 근처에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내게 다가와선 황당하게 "언니~" 라 부르며 불쑥 목걸이를 내밀었다.


"언니, 언니 이뿌다. 이거 사아~. 이거 내가 만들었어."

여자아이를 뒤따라 온 꼬마녀석도 수미 옆에 바짝 다가선다.

"누나, 누나 이뿌다. 이거 사아~. "


아이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건 조악한 목걸이, 팔찌와 띵까띵까 장난감 기타였다.
목걸이, 팔찌야 그렇다 치고 띵까띵까 기타는 뭐냐..
세이브 몰에서 망고라도 살까 하고 들어가는 찰나 아이들에게 잡힌 것이다.


" We are going to buy some things in the save mall, so see you later soon~."

아이들 친구들에게 줄 말린 망고 몇 봉지와 아이스크림을 산 후 세이브몰을 나오니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타려고 하는데 뒤에서 "언니, 언니, 언니~"라 다급히 부르며 아까 그 여자아이가 달려왔다.

"언니, 언니가 이따가 보자라고 했쟈나. 나 기다렸써어."

엄마뻘 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이 언니야가 그냥 한 말이었는데.. 진짜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응? 얘가 한국말을 왜 이렇게 잘 하지?


" 어머, 너 한국말 참 잘 하는구나. 근데 우리 지금 바빠. 저 택시 타고 가야해. 우리 내일 만날 수 있어. 내일 또 여기 올거야."

라고 건성으로 답하며 택시에 탔다.

어차피 밥 먹으러 그 다음 날 다시 올 수도 있었지만 또 만날 수 있다는 내 말에 진심이 묻어 있진 않았다.
그리고 택시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그 아이의 한마디가 내 마음에 꽂혔다.

그것도 아주 아프게.

"Tomorrow is too far away! 내일은 안 와아!"

이 아이는 내게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 했다.
한국말을 신기할 정도로 무척 잘 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한 말 '내일'은 어쩌면 나같은 사람이 던지는 헛된 약속이고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의 사전 속에 '내일'이란 단어는 아예 없을지도 모르겠다.
순간 아이의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달러가 없는데 한국돈도 받니?"라고 하니
"천 원도 괜찮아아~."라고 했다. 마침 천 원이 있었고 급한대로 택시 안에서 목걸이를 샀다.

택시 안에서 가족에게 그 아이와 나눈 말을 하니 수미가 "엄마, 근데 아까 장난감 기타 팔던 남자아이가 나한테 누나 이쁘다며 이 팔찌 그냥 줬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비록 한국 관광객들을 따라 다니며 호객행위를 질릴 정도로 하는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흐려 놓은 것은 바로 몇 푼 안되는 돈 자랑하며 우쭐해하는 한국관광객들일 지도 모른다.


지난 해 수업 중 5학년 학생들에게 뮤지컬 Annie의 주제곡 "Tomorrow" 를 가르쳤다.
그 클라이맥스에선 고아 애니가 이렇게 노래한다.
"Tomorrow, tomorrow, I love ya, tomorrow, it's a day away!"

Tomorrow is a day away.
내일은 그저 하루만 더 지나면 되는 것.

세부 세이브 몰 근처의 물감 묻어나는 조악한 목걸이와 팔찌, 띵까띵까 기타 파는 아이들에게도 그저 하루만 지나면 오는 것이 바로 내일 , Tomorrow이길 간절히 바란다.
그 아이가 말했던 Tomorrow is too far away 가 아니라 Tomorrow is a day away 로 말이다.



3. 헬싱키에서


Don't leave your luggage alone!

헬싱키에서 6일, 스톡홀름에서 3일, 탈린에서 4일의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헬싱키 공항을 다시 찾았다. 헬싱키 여행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작나무 숲을 걸을 수 있는 국립공원 트래킹을 일정상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서 왠지 머지않은 날 다시 올 것 같다. 좋은 핑곗거리 하나 생겼다.


헬싱키 반타 국제공항은 가히 유럽 도시 간 이동의 허브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어느 도시를 간다고 해도 헬싱키를 경유하는 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핀에어의 이점을 충분히 살리자.

항공료도 저렴하고, 기내도 쾌적하며 서비스도 충분하다.


체크인 데스크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앞의 일본인 부부의 체크인 시간이 꽤 길었다.

외국 공항 직원들은 우리나라 공항 직원들처럼 손이 빠르지 않아서 일 처리가 다소 느리다.

차라리 셀프 체크인을 하자고 친구들에게 얘기를 했더니 그러자고 한다.

국제공항에서의 셀프 체크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만약 긴 줄에서 기다려야 한다면 셀프 체크인을 하고 짐 표(luggage tag)까지 스스로 하는 편이 낫다.

luggage tagging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친구 S가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안내 데스크의 여자 직원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여성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다..


Anybody who can speak English here?


이번 여행 동무들은 다 영어 선생님들인데 S를 옆에 세워두고 나와 친구들을 보며 영어 하는 사람 없냐며 성질 비슷한 걸 내고 있다니. 이런 C..


"We all Do speak English though, what's the problem?"

(우리 다 영어 한다. 왜 그러냐?)

" She left her luggage and disappered, she can be a unabomber."

(저 여자가 가방만 놔두고 사라졌어. 폭탄 테러범 아니냐?)


뭐라카노.. 바머(bomber)가 왜 나오노..

몹시 어리둥절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What are you trying to say? I don't understand this situation."

라고 하니 이 건장한 여성이 더 언성을 높여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없냐며 나의 승질을 건드린다.

" I said we all speak English like you. What I'm asking is you gotto explain this situation in detail so that I could understand, all right?"

(야, 우리도 너처럼 영어 하거든. 근데 이 상황을 내가 알아듣도록 제대로 설명해달라는 거잖아!)


나도 짜증을 내며 언성을 높이니 그제야 제대로 된 상황을 설명한다.


Your friend was here just before and then she left her luggage alone, all right?

I thought she is a unabomber so I called the police, Okay?

(니 친구가 좀 전에 여기 있다가 짐가방만 놔두고 가버렸어. 폭탄 테러범이라 생각돼서 경찰 불렀다. 됐냐?)


오 마이 갓은 이럴 때 딱이다.

Oh, my god!!!


그래서 S가 어쩔 줄 몰라하며 저 여자 앞에 죄인처럼 있었던 건가. 친구는 영혼이 반쯤 나가 있는 얼굴이다.

나는 급히 꼬리를 내리며 비굴하게 미소를 뗬다.


We didn’t know that we should not leave the luggage alone, ‘cause we moved only 10 meters away to process the self luggage tagging.

My friend is not a bomber, absolutely not.

(우리는 가방을 혼자 놔두면 안 되는 거 몰랐어요. 셀프 짐 표 하러 겨우 10미터 움직였는걸요. 내 친구 폭탄 테러범 아입니더..어데예~)


최대한 공손한 말투와 표정으로 사태 수습에 나서니 그녀도 한숨을 쉬며 공항경찰한테 전화를 한다.

There was a mistake, no need to come.


그리곤 다시 한번 주의를 준다.


In the airport, you never leave your luggage alone, all right?


어쩌다 S가 캐리어를 잠시 놔두고 움직였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그저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셀프 태킹대가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가방을 두고 움직였던 것 같다.

헬싱키 공항 폭탄 테러범으로 몰려 공항경찰에게 잡혀 갔을 수도 있는 상황을 상상해서인지 아님 이런 상황을 만든 자기의 실수가 부끄러워서인지 S는 그 후로 말이 없었다..


기억하시길.. Don't leave your luggage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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