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의 노래 May 19. 2020

남편의 거기가 아파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버이날에 남편을 잃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어버이날에 남편을 잃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시집 식구들과 어버이날 기념 저녁식사를 잘 마치고 다 같이 송정 바다를 걸으려는 타이밍이었다.

비싼 돈 주고 먹은 소고기를 애써 소화시키려는 웃기는 타이밍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보, 왜 그래? 어디 아프나?

으응.. 아냐. 


남편은 뭐든 첫 번은 사양을 하고, 거절을 하고, 부정을 하는 습관이 있다.

재차 물어 봐주기를 기다리는 안 좋은 습성이라 나는 늘 먼저 물어보곤 내 혀를 깨물고 싶다.

시어머니 앞이라 순간적 짜증을 꾹 참고 입술을 앙 다문채 다시 물어본다.


아니이, 으디가 아프냐그으? 

어.. 배가 좀 아프네. 나는 카페에 먼저 앉아 있을게. 당신은 어머니랑 좀 걷다 와.


어머니야 나 아니라도 누나도 있고, 매형도 있고 시동생 부부도 있는데 굳이 나보고 어머니를 모시고 걸으라는 미션은 뭐냐.. 고 따져 묻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소고기 구이와 전골과 소맥까지 잘 말아 잡순 이 냥반이, 드디어 동백전 카드를 개시한다고 히히 거리던 이 냥반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산책 행렬에서 빠진다니.. 내 남편 냥반이 맞나 싶게 얄미웠다. 


'뭐야.. 지는 여기서 쏙 빠진다고?

송정 바다의 해 질 녘 하늘을 혼자 카페에서 감상하겠다고?' 

어버이날 행사를 혼자 계획하고 주도한 나를 두고 지 혼자 카페에 있겠다는 이기심 9단의 남자가 미워 나는 쌩 하니 바람을 일으키고 돌아섰다.

마음은 부글부글 끓지만 24년 동안 착한 며느리병이란 지병에 시달리고 있는 나는 어머니 팔짱을 끼고 평소보다 더 살갑게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바닷가를 걸었다.

석 달 전 막내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어머니의 슬픔.. 나 역시 엄마라는 지구 상 가장 큰 임무를 수행 중이라 어머니의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모처럼 얼굴에서 마스크를 떼어내어 시원한 바다내음과 바람을 머리카락 휘날리며 맞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네, 시동생네와 함께 남편 혼자 앉아 있는 카페로 들어섰다.

오도카니 앉아 있는 늙수그레 내 남편의 어깨가 잔뜩 움츠려 있다.

간이 툭! 하고 떨어진다.


왜, 계속 아파?

남편은 다른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대답도 않고 안절부절못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더니 아예 밖으로 나가서 한참 후에야 들어왔다.

작년 6월 어느 날 막내 시동생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응급실에 갔었고, 검사 끝에 복막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그리고 채 7 개월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났기에 나는 남편의 이런 모습에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렸다.

애써 태연한 척 있다 독서실에 아들 픽업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남편을 차에 태우고 먼저 나섰다. 남편은 차에 타자마자 너무 아프다며 고통에 받친 신음을 뱉어냈다.

남편은 평소에 어디가 아프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겁이나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갔다.


여보,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거야? 자세하게 말 좀 해봐. 


나는 평소 이 병, 저 병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증상을 들으면 어디가 안 좋다 짐작 정도는 할 수 있는 선무당이다.

남편은 한참 뜸을 들이다 고통스럽게 입을 뗀다.


고환이 아파. 고환 한쪽이 아프면서 옆구리까지.. 어제 점심때 잠시 아팠는데 곧 낫더라고. 그리고 아까 저녁 먹고 나서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너무 아프.. 네..


내 차 조수석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몸을 비틀었다 바로 앉았다 하면서 속수무책으로 통증의 한가운데에 있는 남편을 보니 아들 픽업이고 뭐고 바로 백병원 응급실로 핸들을 돌렸다.

그 와중에도 남편은 조금 지나면 나을 거라고 이 밤에 응급실은 안 가겠다 고집을 부렸다.


여보, 당신 아무래도 요로결석 같아. 돌 때문에 고환이 아픈 거고 방사통으로 옆구리까지 아픈 걸 거야.

나도 담낭염으로 고생해봐서 잘 알아.

죽을병은 아닌데 통증은 정말 무시무시하거든. 응급실 가야 된다.


남편은 요로결석 같은 병은 아닐 거라며, 풍기는 뉘앙스는 더 한 중병 같다는 투로 나의 선무당 진단을 부정했다.

그래, 누가 맞는지 가서 보자..


응급실엔 의외로 환자들이 많이 없었다. 예상외로 진료가 휙휙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당직 교수님은 남편의 증상을 듣더니 초음파 검사부터 했다. 그리곤 요로결석 확률이 크다며 만약 돌이 크다면 감염으로 인한 염증 소견이 보일 텐데 그런 소견은 없으니 다행이라 했다. 통증은 간헐적으로 올 것인데 물 많이 마시고 우선 처방해주는 약부터 먹고 월요일에 외래진료를 받으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진통 주사를 놔달라고 우겼다. 담석의 통증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어마 무시한 고통을 알 수 없다.

진통제가 들어간 작은 수액을 맞고 있는 남편의 손에 차츰 온기가 돌았다. 그의 얼굴도 한층 평온해졌다.


여보, 내가 반은 의사 맞제?

나는 당신이 배 아프다고 해서 너무 놀랐는데 정확히 고환이 아프다는 말에 안심이 되더라고~

극심한 통증으로 거기가 아픈 건 요로결석 아이가~


남편은 진통제를 맞고 웃을 힘이 나는지 희미하게 웃는다.

당신은 정말 의사네..

내가 수술만 못하지 진단 하나는 정확하거덩~

한 시간 전까지 남편을 잃을까 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 마누라와 통증으로 숨조차 제대로 못 쉬던 남편의 한결 가벼워진 대화.. 이 짧은 대화 행간에 내 모든 안도와 감사가 숨을 쉰다.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 늦게 아들과 딸을 픽업했다. 오랜만에 내 차는 덩치들로 꽉 찼다. 아들과 딸은 아빠의 요로결석 통증기를 브리핑받으며 요로결석에 좋은 음식은 무엇인지 서로 검색하기 바빴다.

늘 퉁명스럽고 부모에게 관심 없는 아이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빠 걱정하며 서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모습에 왠지 코끝이 시큰했다.

나는 또 주책맞게 배가 아닌 고환이 아픈 남편이 고맙다.


여보, 차라리 거기가 아픈 게 얼마나 다행이고~

이 한마디에 숨겨진 공포는 막냇동생을 잃은 남편과 나만 알 것이다.

슬프고 아픈 얘긴데 이상하게 웃기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하루, 여행 같은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