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만난 사람 추억
다정이가 삼촌이 농사지은 고구마라며 고구마 한 박스를 보내줬다. (나는 분명히 혼자 사는데 지인들은 늘 먹을 것을 박스로 주신다. 역시 먹을 복은 타고났다. 복이 넘치는 여자 ^^)
텃밭 고구마치고 느무 튼실하여 웬만한 남자 팔뚝 만한 고구마가 박스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고구마요리로 아침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삶은 고구마를 성글게 으깨서 슈레드치즈 를 올리고 계란 두 개를 올려 전자렌지 3분! 예전에 어디선가 본 레서피인데 (딱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렇게 써먹는다.
오늘 엄빠와 동생에게 고구마 나눔 해야겠다. 절대 혼자 먹을 수 없는 양이므로..
다정아, 맛있게 잘 먹을게 ^^
라고 기록해 놓았다.
고구마 보내줬던 다정이가 몇일 전, 출산을 했다. 42세 초산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 것이며 심지어 코로나 걸려 자가격리를 하고 있는 중에 출산하느라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정이는 특유의 명랑함을 잃지 않고 자기답게 출산도 요란하게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천방지축 똥손 다정이가 아가를 낳다니! 내 아이도 아니고 내 가족도 아닌데 감개가 무량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다정이랑은 일하면서 알게 된 사이가 아니고 십수 년 전, 함께 일하던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만난 사이다. 소영이가 쓴 <술꾼도시여자들>의 이선빈과 한선화의 사이, 어느 즈음의 캐릭터를 가진 우리 다정이는 애교 많고 다정다감한 목소리와 허당기 만연한 행동거지의 소유자다. 하지만 일 욕심도 많았고 꽤 많은 자료조사와 분석을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오래 했던 훌륭한 작가다.
베이징에서 일할 땐 중국인 제작사 PD 때문에 있는 대로 열이 받아 백 번도 더 짐을 싸서 서울로 날아왔겠지만 다정이가 있어서 마지막까지 있을 수 있었다. 조곤 조곤 그 애교있는 말소리로 이과적이면서 논리적인 아이템 설명을 해줄 땐 분명히 능력있는 작가인데 어디서 가방을 사와서는 “언니, 가방이 제대로 서있질 않아요. 자꾸 꽈당!해요~ 호호호호호~” 할 땐, ‘다정인 역시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게 매력이지!’ 싶었다. 또 어찌나 먹는 것을 좋아했는지 다정이와 먹은 수많은 만두와 꼬치는 우리의 뱃살이 되어 여전히 생존해있다.
어느 날 뜬금없이 결혼을 한다 해서 놀랐고 내가 녹화를 앞둔 주말에 결혼하는 바람에 결혼식을 못 가 괜히 섭섭했었더랬다. (내가 결혼을 안해서 그런가, 선후배건 친구건 결혼식은 안가는 편이다.) 왠지 다정이 결혼식은 뭔가 재밌고 웃길 것 같아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간 게 지금까지 아쉽다.
손재주도 좋은 다정이가 태교로 인형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는 이제 내 술친구 중 하나가 엄마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 조금 섭섭하기도 했지만 엄마 다정이도, 후배 다정이도, 술친구 다정이도 그냥 다정이니까 괜찮다. 누가 애 낳는다고 할 때 이렇게 신기한 것도 처음이고 (조카가 태어날 때도 이렇게 신기하지는 않았다) 이렇게나 감동적인 것도 처음이다. (조카가 태어날 때도 이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미안하다, 복숭아 -조카님 별명임. *과일아님주의*- 야!) 생각해보면 다정이와 그렇게 자주 만나지도 않았던것 같은데 뭐가 이리도 애틋할까? 싶다.
어쩌면 조금은 나와 비슷한 구멍 숭숭 다정이가 엄마가 됐다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일거다. 출산 후 아가 얼굴도 못본 격리자 산모가 “언니, 와중에 배고파요~”라는 순간, ‘아! 배고픈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는 생각을 한 나는, 홀로 외로이, 오롯이 혼자 병실에 있을, 그래서 걱정 같은 것을 제대로 할 법도 한데, 고작 다정이의 “허기”에 감정이입을 해버렸다. “와중에 배고픈” 다정이도 다정이지만, 나도 참 나답다.
그래도 이런 즈음에 나의 경이로움을 표현할 말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