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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스 Jul 04. 2019

나의 밥 이야기

밥이 되지 않은 밥통

엄마는 늘 새벽밥을 지었다.

걸어서 20여분을 가고 또 거기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가야 하는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 아들에게 따순 밥을 한 숟가락이라도 먹여서 보내려면, 전날에 아무리 밭일이 고되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바쁜 농사철이라면야  날 밝으면 눈 뜨는 것이 농사꾼의 당연지사 할 도리지만 겨울철은 또 달랐다.

농사꾼들에게는 긴 휴가나 다름없는 겨울.

7시나 넘어야 겨우 해가 떠오르고, 해가 뜬 후에도 시커먼 아궁이에, 삐걱이는 나무 문까지 있던 재래식 부엌에는 그나마 한 줌 빛도 들어오지 않던 겨울 아침.

컴컴하고 썰렁하던 어둑한 부엌에 들어가 잔솔로 불 붙이다 눈물 훔치며 불 때어 밥하고, 석유 냄새 풍기며 곤로에 빠알갛게 감자볶음 반찬이라도 할라치면 아무리 농사가 몸에 밴 부지런한 엄마라도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을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반찬은 어제 끓인 국과 며칠 전에 해 놓은 멸치볶음을 낸다고 해도,  전자레인지도 없던 그 시절 따뜻한 밥을  내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 아궁이에 걸린 큰 솥에 불을 지펴 새 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시어머니에 6명의 자식까지 식구도 많은 대가족...찰기 없는 값싼 정부미라도 양껏 먹게 하기 위해서는 꼭 아궁이 밥을 할 수밖에.


그러던 어느 겨울날이었나 보다.

5일마다 열리는 봉화 장에 간 엄마가 커다란 박스를 손에 들고 오셨다.

 가 내 이웃집 과수원에서 일하더니 밀린 품삯이라도 받았나?

전자회사에 다니는 큰언니 덕에 몇 달 전에 -시골 여느 다른 집들보다 먼저- 생긴 텔레비에서 나오는 광고를 유심히 보던 엄마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보온 겸용이 되는 밥통을 사 오신 것이다.

"야 야, 여기다 밥을 하면 이제 불 때다 눈문 날 일도 없고 밥 눌을까 봐 수시로 들여다 볼일도 없데이. 그저 여기다 쌀을 씻고 코드만 꽂으면 밥도 안 눌고 저절로 밥이 된다 하는 거라. 아이고 이런 좋은 세상이 어디 있노?"

엄마는 들떠서 말씀하셨다.


다음날 아침.

6시에 밥을 할 거란 얘기를 들었던 나는 그 신기한 구경을 놓칠 새라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났다.

엄마는 벌써 쌀을 씻어서 밥통 속에 넣고

"물을  얼매큼 너야하노?" 하시며 물을 넣었다 뺐다.

드디어 전기 코드를 꼽았다.

40분이면 밥이 된다고 했다.

정말로 눈물도 안 흘리고, 눌지도 않은 밥을 이제 볼 수가 있는 것인가?

두근두근.

40분이 지났다.

"밥이 돼 가는가 어쩐가 모르겠네..."

엄마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

밥통 옆에서 꼬박 기다리던 우리는 40여분이 지나고 밥통 뚜껑을 열었다.

따란~~~

몽글몽글 김이 나는 하얀 쌀밥을 기대했던 우리에게 나타난 건 그저 물에 여전히 담겨있는 퉁퉁 불은 생쌀.

"아이고야. 이게 무슨 일 이노? 밥통이 고장 났나? 새건대..."

 곧 학교에 가야 할 아들에게 먹일 밥이 없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한 엄마는 거의 울상이 되셨다.

"내가 멍충해보여서 장사치가 고장 난 밥통을 줬나?"

근거 없는 의심도 하셨다.


당혹감은 오후에 집에 놀러 온 이웃집 새댁에 의해 풀다.

이미 혼수로 전기밥통을 사용해본 적이 있는 새댁이 알려줬다.

"코드를 꼽고 취사 버튼을 눌러야 돼요.

 여 버튼 있잖니껴."

아하.. 고걸 몰랐구나.

보온에 빨간 불이 들어오니 밥이 되는 줄 알았지.

취사 버튼을 따로 눌러야 한다는 걸 몰랐구만.

다행히 엄마가 밥통을 잘못 사온 건 아니구나.

"아이고, 전기 상회 사장님은 방법을 똑띠 갈차주지 고걸 얘길 안 해서 울 아들 아침밥도 못 먹고 가게 됐네..."

엄마의 원망 섞인 푸념을 들으며...

결국 오빠는 그날 아침을 못 먹고 학교에 고, 다음날 마침내 방법을 터득한 엄마가 의기양양하게 새로이 한 밥을 먹고 엄마의 노고에 감사한 맘을 가득 담고 오빠는, 우리들은 학교로 향했던. ..어언 40년 전의 추억 한 자락이다.


농촌에 살고 있으나 손바닥 만한 밭뙈기 밖에 없던 우리 집은, 그래서 아버지는 강원도 광산에 돈 벌러 가셨고, 혼자 남아 큰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엄마는 작은 밭에 콩이나 감자 농사를, 남의 집 논 몇 마지기를 빌려 논농사를, 그 외에는 과수원 집에서 일을 해주고 돈을 버셨다.

도지를 주고 남은 쌀로 밥을 먹으려니 대식구에 쌀은 늘 부족하고...그나마 새 쌀은 식구들 생일이나 명절에 먹게 아껴두고 우린 늘 값싼 정부미를 사 먹었다.

묵은쌀이라 찰기가 없던 그 쌀은 왜 그리 먹어도 배가 고픈지..

열 살 여자아이가 지금의 국 그릇보다도 큰 스텐 국그릇에 밥을 한가득 먹어도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엄마는 그나마의 쌀이라도 대려고 얼마나 전전긍긍하셨을까?


밥과 쌀이 하찮게 여겨지는 요즘, 나를, 내 똥배를 이렇게 키운 건 새벽잠 물리치고 밥을 하시던 엄마의 사랑이라는 걸 새삼 알겠다.

전에도 알았고 지금도 알고 있고 계속 잊지 않을 것이다.

볼록하니 나온 내 똥배가 헛배가 아님을 안다.-십대 시절부터 똥배 장전... 우짤꼬...!!-  엄마에 대한 원망은 없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밥을 좋아한 내 탓이려니. 가슴까지 같이 채워졌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젠 요양원에 남편 보내고, 여섯 자식 다 타향으로 보내고 혼자 식사를 시작하신 엄마를 생각하며..나도 내 새끼들 먹일 밥하러 궁뎅이 좀 떼고 일어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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