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통은 선물이다

내 안의 작은 기적들

by 미리나

회복을 하며 나를 이루는 감정과 기억들이 스친다.
불안과 우울이 교차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는 느낌이었다.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버겁고, 어딘가에서 희망을 찾고 싶어도 손에 닿지 않는 기분이었다.

하늘, 땅, 모래알까지 원망이 가득해져 삶에 대한 긍정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당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몸과 마음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처럼 호스피스 병원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는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건강은 없어도 의사 복은 많다고 위안하며 살아가던 시기였다.

입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 좀 어떻게 해달라는 절규가 들려왔다.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가는 요즘이다.

치료 전, 내 감정의 흐름은 어떤 약물이나 과학으로도 완전히 해석할 수 없는 미묘한 영역이었다.

우울과 불안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약점이나 실패로 여기며,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우울과 불안은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차례 정신과와 심리 상담을 받았지만 공황이나 우울을 느낀다고 해서 바로 진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상태가 지속되거나 강해질 경우에야 진단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의학적으로 정확한 병명이 내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내 감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 설명조차 막막했다.

부정적인 생각들은 심심하면 불쑥 나타났고 무기력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햇빛을 보지 않아서"와 같은 조언은 절망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 나에게 가장 큰 위로는 "왜 안 했어"라는 탓을 하는 말들이나 행동이 아닌, '침묵'과 '공감'이었다.

지난해 4월, 치료가 시작되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아픈 주사도 그만큼 좋아질 거라 생각하며 주사를 많이 맞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열이 불쑥 치밀어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질 때는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는 내 모습은 낡고 녹슨 기계 같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작은 기적들을 자주 발견했다.

누군가는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병을 '또라이병'이라 부르기도 했고 나조차 스스로를 자조한 적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귀엽고 깜찍한 구석이 많았다.

집중치료와 케어를 받을 수 있는 영광을 누렸고, 아프지 않은 '좋은 날'도 제법 많았기에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꼭, 세 살배기 아이가 내 안에서 입에 맛있는 걸 넣어달라고 조르듯, 맛있는 걸 먹으면 작은 즐거움에도 마음이 쉽게 반응하곤 했다.

자리를 뜨기 애매한 모임에 갔을 때, 급격히 열이 오르더니 그 열이 나를 구원해 주었다.

어느 날은 택시를 타고 이동 중 중요한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탈 때, 평소라면 핸드폰에 고개를 묻었겠지만, 그날은 발열로 기운이 없어 기사님이 묵직한 핸들을 유연하게 다루는 모습에 눈길이 갔다.

"버스 핸들이 이렇게 컸나?" 작은 것들에 웃음이 나왔고, 그 순간들이 웃음을 주며 모든 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정거장마다 멈출 때마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익숙했던 동네가 낯설고도 새롭게 다가왔다.

저 골목 끝에 이런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있었나, 다 처음 본 세계인 듯 새로운 세상이었다.

햇살 좋은 날, 길을 걷다 좋아하는 장소를 발견하게 되면 그날의 기분은 삶이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여러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과 초여름 사이에는 세상은 나를 위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아름다웠다.

평범한 일상에서 숨겨진 행복이 얼마나 특별해질 수 있는지 깨닫게 해 준 나날들이었다.

고스란히 마주하며 지내던 삶 속에서 공허는 물이 고이는 웅덩이처럼 차오르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강하게 지켰다고 믿으며 고난을 극복할 것처럼 자만했지만, 그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지나쳤음을 알게 되었다.

폐허가 될 때까지 방치한 끝에 마음의 병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고, 그때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침묵이 지금 와서 내 모든 경험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다.

모든 고통은 나를 이루는 일부가 되었고, 오늘의 나를 완성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고양이는 츤데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