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걱댄 하루, 하트나무 앞에서 봉합

멈춰 있던 시간, 다시 흐르다... 가족여행

by Mirmamang

암 진단을 받은 후 6개월.
우리 집의 시간은 잠시 멈춘 듯했다.

하루아침에 일상이 뒤바뀌었고, 나는 병원과 치료, 그리고 회복에 집중해야 했다.
남편은 아이들의 등하원부터 식사 준비까지, 모든 육아를 도맡아야 했다.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날이면 시부모님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입원일이 항상 금요일로 잡혀 주말을 끼게 되어, 시부모님의 수고를 조금은 덜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불안정했지만 버텨내는 법을 배워가던 시간들.


어느 날, 둘째 아이 친구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2호기는 ‘엄마가 아파서 나는 친구랑 집에서 잘 수도 없고, 여행도 못 가요. 하고 싶은 걸 한동안 참아야 해요.’라고 이야기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제 겨우 아홉 살. 아직은 해보고 싶은 것도, 놀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 그런데 그런 아이의 입에서 '참아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는 게 너무 아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억지로 참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집 안에 아픈 엄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이는 조심스럽고 참을 줄 아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너무도 기특하지만, 너무도 미안했다.

물론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때로는 원하는 것을 참는 법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게 ‘엄마가 아프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엄마로서 견디기 힘든 진실이었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이 기특하고 씩씩한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자고.

남편과 상의해 6개월 만에 가족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저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여행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국가유산 방문자 여권’을 신청해 도장을 모으며 여행하기로 했고, 비교적 가까우면서도 의미 있는 장소들이 많은 ‘백제고도의 길’을 목적지로 정했다. 부여와 공주의 국가유산들을 돌며, 해설사 데뷔를 마친 1호기와 예비 해설사 2호기에게도 잊지 못할 시간이 되길 바랐다.


*국가문화유산 방문자 여권

전국 76개의 국가유산을 여행하며 특별 제작된 여권에 각 방문지 도장을 찍어 모으는 체험형 프로그램

KakaoTalk_20250810_232447620_03.jpg
KakaoTalk_20250810_232447620_02.jpg
KakaoTalk_20250810_232447620_01.jpg
마곡사 돌다리, 금동대향로, 부소산성의 멋진 단풍 @mirmamang


부소산성, 왕릉원, 정림사지.
아이들과 함께 역사책에서만 보던 문화재를 직접 걸으며 바라보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12월 초 부소산성의 단풍은 여전히 화려했고, 오랜만에 떠난 우리 가족 여행을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그날의 마지막 목적지는 성흥산성.

해가 지기 전, ‘하트 나무’를 보기 위해 이동하던 차 안.
그 평화로운 시간은 사춘기 1호기와의 작은 말다툼으로 깨졌다. 지금 생각하면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일이었지만,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항암과 표적치료를 병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감정의 기복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내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 끝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성흥산성으로 오르는 길.
남편은 조심스럽게 나와 아이의 눈치를 살폈고, 그 긴장감은 결국 그에게서도 폭발하고 말았다.
2호기는 엄마가 또 힘들어질까 안절부절못했고,
그 아이의 마음을 풀어주려 계획한 여행에서 오히려 더 무겁게 만든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서로를 위한 여행이었는데,
서로를 아프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를 다시 부드럽게 만들었다.
급하게 화해를 시도했고, 다행히 마음은 조금씩 풀려갔다.

그렇게 하트 나무를 만났다.
삐걱거렸던 하루가, 하트 나무 앞에서 조용히 봉합되었다.


산성에서 내려오는 길.
온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하트 충만했다.
완벽하지 않은 하루였지만,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서로를 껴안았다.

무심히 지나가던 풍경이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잠시 멈췄던 시계가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자라고 있고, 남편은 묵묵히 가족을 지켜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프지만 여전히 아이들의 엄마다.

조금 느려도, 가끔 멈춰서도,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걸 함께 해주는 이 가족이 고맙고, 눈물 나게 사랑스럽다.

KakaoTalk_20250810_232447620_04.jpg
KakaoTalk_20250810_232447620.jpg
성흥산성 하트나무, 바삭한 통닭 @mirmama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