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 존 시처럼...
선항암과 수술을 지나며, ‘이보다 힘든 치료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사선과 표적치료는 그 강도나 고통 면에서 선항암과 비교되지는 않더라도, 또 다른 방식의 어려움과 부작용을 동반했다. 방사선 치료는 단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내게는 수치심이라는 감정까지 함께 안겨주었다. 매일 치료를 받으며 마치 제대를 기다리는 군인처럼 하루하루 날짜를 세며 버텼다. 크리스마스 무렵 시작된 방사선 치료는, 치료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캐럴이 흘러나오는 낯선 풍경과 마주하게 했다.
‘이 수치심 가득한 공간에 캐럴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란 생각에 처음엔 어이없고 괴로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치료가 3주째에 접어들면서 나는 무심코 캐럴을 흥얼거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어느새 방사선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2025년의 둘째 날에도, 내 생일인 셋째 날에도 여전히 캐럴이 흐르는 치료실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몇 차례의 치료 후, 조금씩 걷기 운동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남편과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해 통원 치료를 시작했다.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날에는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가는 것도 점차 익숙해졌다.
나는 시간을 허투루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 아이를 돌보고, 일하고, 자기 계발까지 해내며 분 단위로 하루를 살아내던 사람이었다. 늘 하루를 완벽하게 소진한 늦은 밤에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고, 낮에는 소파에 등을 기대는 것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암 투병이 시작되면서 내 일상은 병원과 집을 오가는 쳇바퀴로 바뀌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라는 긍정적인 다짐보다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감에 하루하루가 무너져갔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나를 더 괴롭힌 건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마음이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다시 찾아야 했다. 그 이유 없이는, 하루를 버텨내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시작된 것이 임장, 글쓰기, 그리고 암웨이 홈미팅이었다.
하루는 두꺼운 목도리와 모자, 장갑으로 중무장을 하고 재개발 지구를 2시간 가까이 걸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걷고,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가 현실 경제 이야기와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투자할 자금은 없었지만, 부동산 사장님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임장을 다녀온 날이면 다리가 퉁퉁 붓고 온몸의 기운이 다소진되어 다음 날은 하루를 쉬며 글을 썼다. 암 투병 중 느끼는 감정의 변화, 그리고 그 감정들이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돌아보며 마음을 쏟아냈다. 글쓰기는 마치 혼란스러운 내면을 천천히 정리해 주는 행위였다. 또 다른 하루는 암웨이 홈미팅에 참여했다. 단순한 제품 설명이나 홍보가 아닌, 인문학 강의처럼 나에게는 또 하나의 공부이자,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창이었다.
그렇게 나는 ‘하루 일정’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마지막 잎새의 존시가 유리창 밖의 나무에 달린 단 한 장의 잎새를 바라보며 삶의 끈을 놓지 않았듯, 나 역시도 매일의 작은 일정 안에 ‘살아야 할 이유’를 저장했다.
그 일들은 거창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생명줄과 같았다. 어제를 버텨낸 내가, 오늘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힘. 임장을 나가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며 나는 다시 ‘살아있는 나’로 돌아오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