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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둘 Mar 29. 2023

붉은 절벽

[수필]


  자암이여, 언제 이렇듯 내 앞에 서 있는가.
 네 속 깊은 곳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가.
 너의 붉은 몸은 언제부터였는가.
세월을 거듭할 때마다 어떤 노래를 불렀는가.
굽이쳐 내려오며 쏟은 서러움은 얼마나 깊었는가. 




    이왕이면 계곡을 따라 올라가고 싶어 헌실마을로 돌아갔다. 걸어오다 보니 ‘비가 내려 탐방로에 물이 고여 있을 경우 우회 탐방로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푯말이 서 있다. 물이 불어오르면 계곡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모르긴 몰라도 마을 사람들도 큰 물에게 당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은 나그네들을 살펴봐 준다.      


  청송의 산하는 들판의 곡식들을 야물게 찧어주고 있지만 아직은 더운 바람이 꼬랑지를 짤랑거리며 돌아다닌다. 헌실마을 끝자락의 새마교를 지나 붉은 절벽 앞에 섰다. 중국 땅에 와 있는 느낌이다. 아무리 봐도 우리 것이 아닌 듯한 절벽의 빛깔이 낯설다. 


  노인은 도인(道人)처럼 소매 넓은 도포를 입고 강가에 널따랗게 자리 틀고 앉아 있었다. 신성계곡의 물이 산에서부터 세마치장단을 하며 이 앞을 지나가도 눈썹 하나 꿈쩍 않는다. 누가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으니 가부좌를 틀고 바둑판 위 바둑돌만 튕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고집스럽게 단단한 절벽의 끝자락에는 자상함이 묻어 있다. 


  강가에는 지난 폭우로 물을 따라 내려가다 걸린 통나무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돌덩이에 걸려 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니 석양의 시간도 아닌데 절벽 아래는 어쩐 일인지 벌써 노을빛으로 주름진다. 자암(紫巖) 노인은 물 위에 쉴새 없이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자암이여, 언제 이렇듯 내 앞에 서 있는가. 네 속 깊은 곳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가. 너의 붉은 몸은 언제부터였는가. 세월을 거듭할 때마다 어떤 노래를 불렀는가. 굽이쳐 내려오며 쏟은 서러움은 얼마나 깊었는가. 자갈이나 모래였을 때, 때로는 진흙이었을 때 그대는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가. 몸이 그 한 폭의 병풍이 될 적마다 하늘은 얼마나 빛났겠는가. 강가의 자암이여.     


  태어난 시기별로 색다른 이름으로 불리면서 숱한 사연으로 목숨 연명해가는 사람들. 어떨 땐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로 살고 어떨 땐 이기적인 행위의 소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어떤 이는 반역자의 이름으로 삶의 터널을 모질게 건널 때 이들 속에 켜켜이 쌓이는 상흔들이 이 핏빛과 어찌 다르지 않으랴.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에 피가 스며들고 통증이 시작된다. 할퀸 자리에 둥근 반원의 피가 차오른다. 광기를 발산하며 달음박질쳐 오는 저 스페인 투우(鬪牛)들처럼 그 지점의 혈관은 헐떡인다. 그것이 고요함으로 잦아들 때까지 기다림이란 거룩한 것이다. 마침내 상처가 아물 때야 가해자를 용서할 여지가 생겨난다. 우리는 누구나 상처를 통해 길을 잃는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열린 길은 없었다. 처음의 내 자리에는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자신이 그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로 어리둥절해한다. 한 사람은 자리 틀고 앉아 있는 구도자이며 한 사람은 나그네이다. 이 두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만날 수 있다.


  너른 들판의 아늑한 물빛 아래 붉은 절벽. 또다시 절벽 아래 그림들이 흔들린다.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일까. 절벽 앞에 그토록 오래 앉아 꿈이라도 꾸었나. 그러지 않고서야 따가운 햇발의 자암 앞에 이토록 오래 머물 수 있었더란 있단 말인가. 새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새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타고 오는 물결이 춤추었는지 모르겠다. 계곡의 물소리가 들렸다. 먼 산에서 붉은 절벽을 향해 내리치는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 모르겠다. 세월 속에 켜켜이 쌓인 붉은 절벽의 속삭임 같은 것을. 

    

  계곡을 서서히 벗어나자 강 하류 쪽에 사람들이 모여 다슬기를 잡고 있다. 그들은 야물게 강바닥을 뒤적인다. 돌들이 이리저리 옮겨지는 것은 또 한 삶을 살아가는 물상(物像)들의 생존전략이다. 다슬기는 계곡 바닥의 돌을 옮겨주는 일을 업으로 삼았는지 마냥 강바닥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그리해야 누군가 그들을 잡을 것이다. 그리해야 강바닥 돌은 자리를 옮길 것이다. 어쩌면 다슬기는 돌과 물과 오래전부터 계약관계를 맺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계곡으로부터 먹을 것을 챙겨 받는 대신 강바닥을 끊임없이 순환시켜야 한다는 조건의 거래. 


  다슬기를 잡을 때마다 내지르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신호로 이 계곡 바닥의 돌들은 쉼 없이 이주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이야기는 절벽 속 그림 한 폭으로 인양(引揚)되는 것이다. 해가 기울자 노을이 강줄기를 감싼다. 자암 노인은 물을 바라본다. 그사이에 노인도 해도 없고 한 장의 그림만 남는다.   

   

  사람들은 다슬기를 잡으면서도 자암 노인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생명 하는 것들은 모두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가슴 벅찬 감동. 이렇게 붉은 절벽 아래 강물들은 나그네들을 안아 준다. 다슬기 잡는 사람들이 강가의 자암 노인과 그 앞의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열린 길은 없었다. 
처음의 내 자리에는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자신이 그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 사람은 자리 틀고 앉아 있는 구도자이며 한 사람은 나그네이다.
이 두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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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절벽 : 경북 청송 ‘만안’에 있는 붉은 색을 띤 절벽이란 뜻의 ‘만암자암단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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